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4월27일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혼이 곧 혼자 산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의 지은이 백지선씨는 결혼하지 않고 두 아이를 입양해 어머니, 형제자매와 양육 공동체를 만들었다. 비혼 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의 구성원은 비혼이고 함께 살며 소득에 따라 월세를 나누어 낸다. 비혼모와 비혼부를 비롯해 다양한 조합의 동거 가구도 있다(〈시사IN〉 제715호 ‘법과 제도 너머, 세상에는 이런 가족도 있습니다’ 기사 참조). 결혼에 기반한 전통적 개념의 가족을 대체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흐름을 역행하는 건 정부와 제도다. 최근 여성가족부(여가부)가 가족의 법적 정의(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를 삭제하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현행 유지가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내면서 지난 18년간 이어진 논의를 무력화했다. 여가부는 ‘건강가정’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존치 의견을 밝혔다. 불과 1년 전과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족의 형태는 해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는데, 왜 정부는 태도를 바꿨을까. ‘가족의 정의’는 왜 중요한가. 그 지난한 흔적을 살폈다.

2004년 2월 제정되어 2005년 1월부터 시행된 건강가정기본법은 입안 당시부터 찬반 논란이 거셌다. 김인숙 가톨릭대 교수(사회복지학)는 2003년 3월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열린 공청회를 ‘건강가정육성기본법(안) 사태’라고 명명한다. “한국 사회에 가족을 정치적 어젠다로 등장시키고 가족에 관한 이념 투쟁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한국사회복지학 제59권 ‘건강가정기본법 제정과정에 나타난 가족 및 가족정책 담론’).” 보건복지부가 가정복지의 제도화를 위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한 결과 건강가정기본법의 토대가 된 건강가정육성기본법이 나왔다. 그에 대한 공청회를 기점으로 찬반 논란이 거셌다.

앞서 2000년에도 비슷한 성격의 가정복지기본법이 발의됐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혼율 증가와 저출산 등이 위기로 강조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건강가정 구현’을 위한 국민의 의무와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이 법안은 국가가 가족에 대한 개입을 표명한 최초의 법적 장치라는 의의가 있지만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던 데다 법안 내에 상충되는 가치가 혼재되어 있는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됐다. 무엇보다 가족의 범위를 혼인·혈연·입양으로 제한한 점이 다원화된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찬반 논쟁 당시 가족정책에 대한 극명한 시각차가 드러나기도 했다. 김인숙 교수에 따르면 법안에 찬성하는 쪽 시각에서 가족은 국가가 ‘육성’해야 할 대상이었다. 개인에게는 ‘건강한’ 가족을 이루고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비판하는 쪽은 가족 ‘지원’을 위한 보조적 위치에 국가를 두었다. 특히 ‘건강가정’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격론이 이어졌다.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가족, 즉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며 낙인효과를 낳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애인·한부모 가족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라며 당사자 단체가 반발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법 이름이 일부 가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유발할 수 있다며 수정을 권고했다. 12월에는 그해 출범한 여가부 의뢰로 한국여성개발원이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개정안을 냈다. 가족의 정의를 ‘사실혼, 위탁가정, 그 밖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동체’로 확장했다. 명칭 역시 가족정책기본법으로 수정하는 안이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가운데)과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이 9월2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용혜인 의원실 제공

17대 국회(2004~2008년)에서 발의된 개정안은 명칭을 가족지원기본법, 가족정책기본법, 평등가족기본법 등으로 바꾸고 가족의 범위를 재정의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지난 9월28일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이근옥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가족법팀)는 당시 개정안에 대해 “혼인·혈연·입양을 넘어서 사실혼, 위탁가정 등으로 확대하거나 아예 가족의 정의를 삭제하는 안이었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을 중요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제8조와 가족해체 예방 규정(제9조)도 삭제했다. 당시에도 혼인과 출산은 개인의 선택 사항이라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가족해체 역시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과 가족의 변화로 보는 시각이 공존했다”라고 설명했다.

가족에 대한 법적 정의는 왜 중요한가

19~21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혼인을 통한 가족 구성 비율은 감소하고 있었다. 2014년에는 생활동반자법으로 알려진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 초안이 작성되었다. 2020년 남인순·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안에서 가족 정의를 삭제하고 법 이름을 ‘가족정책기본법’으로 바꾸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고 여가부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당시 여가부 조사에서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데 동의한 응답자 비율이 69.7%였다. 여가부는 지난해 제4차 건강가족기본계획에서 가족 다양성 포용을 1순위 과제로 올리며 종전의 입장을 다시 한번 명확히 했다. ‘포용되지 못한 가족’의 예시로 사실혼, 위탁가정과 더불어 ‘돌봄과 생활을 함께하는 노년의 동거 부부’를 언급했다. 국회에서 계류되다 폐기되길 반복하던 개정안의 향방도 주목을 받았다.

가족에 대한 법적 정의는 왜 중요한가?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소장은 저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이상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상상이 이상적인 시민에 대한 상상과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말한다. “가족의 정상성은 가족 안의 이슈가 아니라 사회가 이상적인 시민을 상상하는 방식과 연동된다는 점에서 가족 밖의 이슈다. 결국 가족을 정치화하는 것은 새로운 시민적 유대와 친밀한 결속에 기반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제도가 법적 가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도 가족 정의의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이민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 활동가는 “‘법적 가족’이 아닌 가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함께 살며 서로를 부양하고 있음에도 납세, 사회보험, 주거, 노동 등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 체제 안에 온전히 포함되지 못함으로써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실정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급하게 수술동의서를 써야 할 때, 보호자로서 구급차에 동행하거나 진단서 같은 서류를 발급받을 때 ‘가족 밖의 가족’은 어려움을 겪는다. 공동 재산을 형성하기도 어렵고 상속 권리로부터도 배제된다.

여가부의 갑작스러운 입장 번복을 두고 일부 개신교와 보수 세력을 의식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들은 가족 개념의 확대가 곧 동성혼 합법화로 이어질 거라며 개정안 반대 운동을 벌여왔다. 혈연에 기반하지 않은 가족관계를 협소하게 해석한 결과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비친족 가구(친족이 아닌 남남으로 구성된 5인 이하 가구)는 약 50만 가구이고 가구원은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겠다며 법안의 이름 수정마저 거부한 여가부의 결정은 18년간 이어진 그간의 논의와 진척을 모두 ‘소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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