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최근에 나온 시집 네 권을 읽었다. 그중 반가운 것은 정화진의 세 번째 시집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문학동네, 2022)였다. 이 시집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활동하지 않는 시가 거의 없다. “부엌을 벗어나 맨발로”(‘너는 길이 어두워 꽃을 보지 못했구나’), “들판과 풀밭과 산맥을/ 건너”(‘그대, 울지 말아요’), “온몸에 바늘을 꽂고 사막으로/ 묵묵히 걸어간”(‘온몸에 바늘을 꽂고 사막 그늘로 묵묵히 걸어간 사람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왜 “여행 계획을 다시, 계속, 짜야만”(‘고양이와 폴란드 여행’) 하고, “우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대여”(‘벚나무 아래’)라고 서로를 격려하는가.

정화진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현대시란 무엇일까?’라고 자문해본다. 이런 질문을 받은 100명의 문학 이론가들은 100개의 제각기 다른 답을 써낼 것이다. 혹은 코웃음을 치며 아예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기도 할 것이다. 대저 인문학은 질문 자체의 깊이를 궁구할 뿐, 답을 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 않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는 이들을 포함한 99개의 답은 모두 오답이라고 말하려 한다.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발표된 지 100주년이 되는 T. 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1922)에 현대시의 전형이 있다. 이 장시는 현대인의 정신적·육체적 황폐와 신앙 상실을 토로하면서 불모가 되어버린 세계를 되살리고자 한다. 다시 말해, 문명 비판과 재생이라는 주제를 마주하지 않고는 김소월이요, 서정주요, 박목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농경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백석류의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있지만, 현대시는 ‘오늘 완성했거나 발표된 시’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현대시에 미달한다. 이런 단언은 언젠가 이 지면에서 “현대시는 한마디로 도시 현상이죠. 도시가 없었다면 현대시도 없었다는 뜻이다.”(〈시사IN〉 제746호 ‘현대시, 도시를 산책하는 사람이 남긴 흔적’ 기사 참조)라고 했던 말과도 통한다. 김소월도 백석도 최상의 시는 썼지만, 현대시를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황무지〉는 중세부터 내려온 아서왕 이야기의 한 조각인 어부왕(漁夫王· Fisher King) 모티브를 핵으로 삼고 있다. 어부왕은 부상 또는 질병으로 인해 성 불능에 빠졌고 왕의 신체와 국토를 동일시했던 중세인들의 상상력에 따라, 왕의 불임은 국토의 황폐(흉년)로 이어진다. 이 저주를 풀려면 그리스도의 피를 받았던 성배를 찾아야 했다. 그 임무를 위해 발탁된 기사가 페르스발(퍼시벌)이다. 엘리엇은 중세 로망스에 나오는 병든 어부왕의 처지를 현대문명으로 바꾸고, 성배를 인도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으로 대체하는 잔꾀를 썼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

힌두 경전에 이어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주문 “샨티 샨티 샨티(평화, 평화, 평화)”까지 동원됐으나 이 장시에는 엘리엇의 기독교적 호교론이 강하게 메아리친다. 클린스 브룩스는 〈황무지〉에 관한 논문에서 기독교적인 주제가 이 시의 핵심에 있으나 시인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엘리엇은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기독교적 비전을 작품에 성실히 표명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를 잘 알았다. 단테는 〈신곡〉을 쓰면서 독자를 설득할 필요가 없었지만, 엘리엇에게는 기독교가 갖고 있어야 할 광휘가 없었다. 그래서 비기독교적 풍요 의식인 성배전설과 〈우파니샤드〉 등을 빌려왔다. 이런 조작은 독자를 이교 세계로 내던지는 것 같지만, 독자들은 작품에 동원된 이야기 재료의 본질적인 유사성에 따라 결국은 기독교적 세계로 인도된다. 〈황무지〉가 서구 문학의 정전이 된 비결이다.

두 시인의 닮은 점과 다른 점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정화진 지음
문학동네 펴냄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는 물론 장시가 아니지만, 여기 실려 있는 시 59편은 엘리엇의 그것같이 시집 전체를 ‘타락(낙원 상실)→회복 서사’로 재구성할 수 있다. 동해에 수장되어 있는 문무왕(‘물의 말’)과 외로운 노인(‘너에게 강을 빌려 주었더니’)은 어부왕처럼 침묵을 지키거나 무능에 빠져 있고, 이들을 활성화하는 것은 육포 조각을 품고 길 떠나는 여자들이다(‘새장 속의 육포 조각’ ‘육포에 대하여’).

엘리엇은 어부왕 이야기를 문명 비판과 재생의 이야기로 변용하면서 신앙 회복을 해결책으로 내어놓았다. 반면 정화진은 똑같은 문제와 대결하면서 여성과 생태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했듯이 이 시집에는 맨발로 부엌을 뛰쳐나와 길 떠나는 숱한 여성이 나온다. 이들의 여로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마침맞게도 ‘바리데기’라는 제목의 시가 웅변하고도 남는다. 바리데기 설화에서 바리공주는 병든 왕과 왕비를 구하기 위해 저승에서 생명수를 구해 와야 했다. 이는 어부왕을 치료하기 위해 성배를 찾아나선 페르스발의 역정과 겹친다.

어부왕 이야기와 바리데기 설화는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지만, 임무를 맡은 페르스발의 모험은 기본적으로 남성 영웅을 구현한다. 이 일화를 장시에 차용한 엘리엇이 구세라는 막중한 역할을 남성에게 맡긴 것은 당연하다. 재미난 것은 〈황무지〉뿐 아니라 엘리엇의 모든 작품에는 ‘좀비’와 생의 약동(élan vital)을 잃어버린 권태로운 인물이 득시글거리며, 특히 여성은 가구에 지나지 않거나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식으로 묘사된다. 이런 인물들의 대거 출현은 남성 구도담(求道談)의 실패이자, 백인 남성이 구축한 모더니즘 문학의 파산을 보여주지 않는가(현재 엘리엇은 영미 시단에서 ‘역사적 인물’로 존재할 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여성들의 구도담은 남성들의 그것과 다르다. 심청이 물에 빠짐으로써 아버지 심 봉사를 구하고, 안티고네가 죄지은 늙은 왕 오이디푸스를 돌보며 비참을 함께 나누듯이, 바리공주는 저승으로 내려가는 자기희생을 감행하며 임무를 완수한다. “시체가 산을 이룬 곳에서 우리는 겨우 흙냄새를 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때야 아녀자들의 춤사위만 손끝에 남아 남아서 이 세상은 그 춤사위 속에서 다시 꽃필 날을 기다리게 되리라 신성한 빛들만 그녀들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태초의 말의 바다를 이루게 되리라”(‘색채가 끝나는 시간, 또는 육체의 자리들이 상승한다 그리고’). 세계를 다시 꽃피우기 위해 사막과 망망대해와 빙하를 건널 때마다 시인의 이(齒)가 하나씩 빠진다. 헤르메스가 이 사람을 지켜주기를!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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