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마이클 왈저의 〈성도들이 일으킨 혁명〉(대장간, 2022)의 원제는 ‘The Revolution of the Saints’다. 성도로 번역된 ‘Saints’는 ‘청교도(Puritan)’를 가리킨다. 청교도는 종교개혁에 찬동한 영국인 가운데 칼뱅주의를 선택한 이들로, 칼뱅주의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을 구상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베버는 칼뱅의 예정설이 가진 구원의 불확실성이 금욕주의와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이끌어냈으며, 거기서 기업가형 인간이 양산됐다고 말한다.

청교도혁명(1642~1651)은 광범위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인클로저(울타리 치기)로 인한 시골 인구의 유민화,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범죄 증가, 종교적 공백, 전통적인 사회 제도의 해체. 이런 대격변에 대응하기 위해 청교도가 추구한 규율이 금욕과 노동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베버는 자본주의를 발흥시킨 심리 원인 정도로 칼뱅주의를 축소했다. 그러나 청교도가 자본주의에 기여한 몫은 부차적인 결실일 뿐이다. 청교도는 기성 교권과 정치체제 모두와 대립했다.

새로운 성도는 새로운 시민이었다. 왕정과 봉건체제 아래서 신민은 왕이라는 정치적 신체에 딸린 유기체였고, 이 시절의 정치는 일부 모험가들의 일탈에 지나지 않았다. 청교도는 최초의 시민이자 근대적 정치 주체였다. 왈저의 주장을 이어받은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민음사,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당은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연결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노동과 생산뿐 아니라 교육과 정치를 위한 거대한 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영향을 받은 조직인 정당 또한 금욕적인 이상과 다음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었다. 규율, 권위, 충동의 지연이다.” 왈저는 자코뱅(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러시아 혁명)와 같은 ‘정치적 급진주의의 기원’이 청교도였다고 말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허다한 천년왕국운동, 조선시대의 동학, 청나라 말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교가 새로운 정치 주체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개신교 교단도 ‘프로테스탄트=자본주의’라는 베버의 공식을 반박하지 않았고, 도리어 많은 교회가 이 공식을 새로운 복음으로 떠받들었다.

어쩌다 연쇄살인범과 이상 범죄에 관한 책을 연이어 읽었다. 이 분야의 필독서인 로버츠 K. 레슬러의 〈FBI 심리분석관〉(미래사, 1994)과 한때 그의 동료였던 로이 해이즐우드의 〈프로파일러 노트〉(마티, 2015)는 다시 읽었고, 마르크 베네케·리디아 베네케의 〈신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알마, 2016)와 토마스 뮐러의 〈인간이라는 야수〉(황소자리, 2009)를 새로 보탰다. 연쇄살인범과 이상 범죄에는 불변의 원형이 있지만, 이런 범죄자나 범죄에 사회과학적 분석틀은 소용되지 않는다. 빈곤, 학업 중단, 실업에 처한 흑인 청년들이 범죄자로 전락하지만 연쇄살인과 이상 범죄의 99%는 20~30대 백인 남성이 저지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백인 남성보다 흑인 남성을 더 경계한다. 사회과학적 분석틀이 심어놓은 선입견 탓이다.

〈폭력 계보학〉(카리스아카데미, 2022)을 쓴 찰스 벨린저는 사회적이나 정치경제적 분석은 폭력의 영적인 면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고 말한다. 폭력은 수평적(사회관계)으로도 이해해야 하지만 수직적(영적)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불려온 철학자는 키르케고르인데, 지은이는 키르케고르의 중요 관심사가 폭력이었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가 폭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많은 독자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에, 이런 나의 시도가 엉뚱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단독자·불안·군중 같은 키르케고르의 중요 개념이 모두 폭력의 심리적·신학적 기원과 연관되어 있다.

지구의 진정한 정치 행위자는 ‘비인간’

개개의 인간은 단독자로서 영적인 성숙을 계속해나가야 하지만, 현재의 모습과 달라져야 한다는(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불편함을 넘어 불안을 선사한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애(나르시시즘)라는 고치 속에 숨거나 군중의 일원이 되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죽였던 옛 유대 사회가 그랬고, 민족이라는 허상을 내세워 다원화 사회를 거부하는 오늘의 유럽 극우정당이 그렇다.

필리프 데스콜라는 〈타자들의 생태학〉(포도밭출판사, 2022)에서 1986년부터 꾸준히 주창해온 ‘자연의 인류학(anthropology of nature)’을 설명한다. 인류학은 흔히 모든 형태의 인간 문화에 대한 연구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류학의 이미지는 백인 학자에게 관찰되고 있는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또는 태평양에 위치한 섬 주민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인류학은 서양 백인이 그 밖의 인종을 연구하는 것이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학자 스스로도 인류학을 학문적 유럽중심주의라거나 자민족중심주의로 비판해왔다.

27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인류학의 한계는 인류학이 서양에서 발생하여 식민주의와 함께 성장해왔다는 이유가 크지만, 인류학이 고수해온 이원론이라는 고유의 방법론에도 무시 못할 원인이 있다. 인류학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을 기본값으로 놓고, ‘자연=원시=여성=비유럽’ ‘문화=문명=남성=유럽’ 등의 이항 구조를 온존하고 증식한다. 이런 이원론은 순수한 자연도 없고 자연에 기초하지 않은 문화도 없다는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로 얼마간 허물어졌다. 그러나 인류학이 이원론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연주의(naturalism)’가 유지되는 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인간주의 판본인 인간 종 중심주의는 변하지 않는다. 데스콜라가 말하는 자연주의는 예술상의 자연주의가 아닌 근대인이 정립한 보편적인 우주론으로, 자연을 인간 바깥에 있는 대상으로 본다. 자연이 인간 바깥의 대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용하고 조작할 수 있다. 환경보호 사상은 자연주의와 사뭇 다른 것 같지만 자연을 보호한다는 생각도 자연이 인간 바깥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고다.

지금까지 인류학은 인간이 주인이었으나, 자연의 인류학은 인간과 비인간을 일원화한다. 여기서 비인간은 동식물·정령(精靈)·광물 등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비인간의 인류학’이라고 불러야 할 데스콜라의 아이디어는 인류학을 넘어 철학자와 생태주의 운동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데스콜라의 친구였던 브뤼노 라투르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이음, 2021)에서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아니고 유일한 정치 행위자도 아니라면서, 지구의 진정한 정치 행위자는 지구이며 여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비인간)라고 말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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