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1976)을 다시 읽었다. 유일신관에 대한 예리한 해석과, 공정과 사랑의 원리가 정반대라는 것을 분석한 대목은 재독이 안겨준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이다. 프롬은 1956년 초간된 이 책에서 사랑은 주체성의 산물이기에 ‘나’에 대한 자긍과 자립심이 없으면 연인은 물론 이웃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들여 입증한다. 하지만 출간된 지 60년이 훌쩍 넘은 이 책의 한계도 분명하죠.

먼저 지적할 것은 동성애에 관한 사항이다. 프롬에 따르면, 에로스적 사랑은 “합일에 대한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 욕구는 하늘과 땅이나 빛과 어둠처럼, 성질이 전혀 다른 “극(極)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다시 말해 프롬에게 성적인 사랑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이상적이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보면, “동성애적 일탈은 이 양극화된 결합이 성취에 실패한 것”이다. 즉 동성애자는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이라는 극을 만나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이성애를 정상에 놓고 양성애를 장애로 간주하는 이런 설명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죠.

두 번째로 프롬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발견되는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판에 박은 해석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사디즘이 비롯하고, 힘에 대한 동경이나 불행한 유년기의 외상에서 마조히즘이 발생한다는 그에게 사도마조히즘 관계는 주체가 되지 못한 미숙한 두 인격이 조화 없이 공서(共棲, 전혀 다른 것이 함께함)하는 상태다. 하지만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시공사, 2012)에 대한 장문의 논평이었던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돌베개, 2014)는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프롬의 해석이 그가 겪었던 나치 시대에 고착되어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세 번째 한계는 이별에 대한 의미 부여가 없는 것인데, 사랑의 기술을 이야기하면서 이별의 가치를 놓친 것은 중대한 결함이죠.

수십 년 만에 프롬을 다시 읽은 것은 헤르만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그린비, 2022)를 잘 읽기 위해서였다. 독일에서 나온 이 책의 원제는 그냥 〈사랑(Die Liebe)〉이지만 한국어판 제목이 〈사랑의 현상학〉인 것은 지은이가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으로 사랑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은 본질 또는 이데아(이상)의 반대말이므로 현상학은 자연히 그리스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이 추구해온 이성 중심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형이상학적 본질에 매몰된 그리스 전통의 서양철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왔던 반면, 현상학은 인간의 신체와 감정 그리고 일상생활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상학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170~175쪽에 있으니 한번 보시죠.

대중가요 속 ‘합일’은 가능할까?

사랑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도 있고, 우애(필리아)도 있고, ‘파트너 사랑’ 즉 에로스도 있다.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에로스다. 지은이가 이 가운데 연인 간의 사랑에만 집중한 이유는 서양철학에서 에로스가 무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신체와 감정을 가진 모든 인간에게서 생겨날 수 있으니 이성애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지은이가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이유죠.

한국어판 제목에 덧붙여진 부제 ‘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에서 환상은 이데아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사랑의 이데아라면, ‘사랑이란 나누어졌던 반쪽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던 플라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사랑은 합일이라고 말한 프롬도 그러하지만, 숱한 대중가요가 이와 같은 사랑의 이데아를 되풀이한다. 플라톤도 에로스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에로스는 인간의 “영혼이 다시 이데아의 왕국으로 상승하도록 자극하는 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스인의 주장은 프로이트의 승화 이론을 떠올려주죠.

‘둘이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이데아는 가능할까. 나누어졌던 반쪽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서로 붙이고 접합시킬 수 있는 물체, 곧 사물뿐이다. 인간은 깨어진 유리그릇처럼 오공본드나 돼지표 본드로 붙일 수 없다. 인간은 자신들의 사랑을 상황으로 그리고 감정으로 서로 공유할 뿐인데, 알다시피 상황도 감정도 유동적이다. 게다가 인간은 주체적으로 존재하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은 사실상 영원히 불가능”하다. 사랑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존재여야 한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프롬과 상통하죠.

그럼에도 둘이서 하나가 되는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슈퍼카를 제 몸같이 사랑하는 운전자가 있다고 치자. 차는 말과 같은 주관성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지만 그 운전자는 자신의 슈퍼카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종종 형성되는 공생의 경우로 운전자와 차는 일체가 된 희열을 멈추지 못하고 고속도로에서 함께 사망하기도 한다. 인간과 리얼돌(성인 신체를 본떠 만든 인형)의 관계는 좀 더 극적인데, 두 경우 모두 한쪽이 사물이기에 성취 가능했던 사랑의 이데아다. 이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은 인간끼리 맺어진 연인 사이에도 흔하다. 사랑의 이데아는 끔찍해요.

플라톤식 사랑의 이데아에서는 이별이 불가능하다. 원래 나의 반쪽이었던 당신이 떠나는 것을 어찌 감내하랴. 실은 이 주제는 대중가요의 몫이다.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나에게로 올 사람을 위해 주단을 깔고 있기에 이별의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다. 진짜 사랑했다면 헤어질 때도 “사뿐히” 밟고 갈 수 있게 주단을 깔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오래 전에 김소월이 떠나는 님에게 진달래꽃을 뿌려주었듯이. ‘함께 있음’의 원천은 ‘개별화된 각자’라고 말하는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 속에는 이별에 대한 불안과 고통이 내밀하게 얽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의 주관성을 양해하는 커플에게는 오히려 그 “고통이 두 사람을 결합시키고, 또한 두 사람의 공동성에 무게와 온기를 부여해준다”. 지은이는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네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맞아!”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개념인 수축과 박탈적 확장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내체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사르트르의 타자론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책에는 사도마조히즘의 ‘사’자도 나오지 않지만 256쪽 첫 줄에 나오는 “또 다른 접촉 방식”에서부터 사도마조히즘의 현상학적 분석을 구상할 수 있죠.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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