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31일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추모식에서 참전용사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월8일 세상을 떠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생이다. 20세기의 역사적 증인이라 할 그녀는 자동차 정비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최후의 국가원수였고, 한국전쟁의 일부 기간에는 영국 여왕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유엔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지. 그중에는 오늘 얘기할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 대대도 포함돼 있었어.

1951년 초 압록강까지 진군했던 국군과 유엔군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치고 중공군은 거침없이 북위 38°선을 넘었다. 유엔군은 북위 37°선까지 후퇴하게 되지. 평택과 삼척을 잇는 37°선 방어선이 붕괴된다면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미국은 한국 정부를 해외로 옮기는 작전까지도 비밀리에 세워두고 있었어. 대륙을 잃은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에서 명맥을 이은 것처럼 말이다. 

가까스로 반격의 시동을 걸고 중공군을 격파하면서 1951년 3월 다시 서울을 탈환했지만 중공군은 그해 4월 춘계 대공세를 편다. 흔히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사람 수로만 밀어붙이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사실은 일종의 ‘파도 작전’이었어. 파도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연이은 공세를 전개하면서 수비 진영을 지치게 만드는 작전이지. 하지만 1951년의 중공군 춘계 대공세는 흔히 이해하는 ‘인해전술’ 쪽에 가까웠다. 무려 70만 대군이 덤벼들었으니까. 

삼국시대 이래 경기도 파주 감악산에서 임진강에 이르는 지역은 전략적 요충이자 격전지였다. 신라와 고구려는 이 일대에서 여러 차례 사활을 건 전투를 치렀지. 감악산 인근에는 신라의 요새 칠중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감악산 서쪽의 설마치(雪馬峙) 고개는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말 타고 도망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해(‘설’에 해당하는 한자는 다르지만). 1951년 4월, 칠중성과 설마치 고개가 위치한 이 전략적 요충지에서 또 한번 대격전이 펼쳐진 거란다. 주변을 통제할 가장 높은 고지인 감악산을 잃은 후 영국군 29여단의 다른 대대들과 유엔군은 후방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29여단 소속 글로스터 대대는 설마치 고개가 있는 설마리(雪馬里)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절망적인 방어전을 치르게 돼. 고립된 영국군 600여 명을 향해 중공군과 북한군 3만 대군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좀 엉뚱한 얘기를 가져와보면, 타이태닉호가 침몰할 때 이 배의 선장은 선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바 있다. “Be British!”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뜻이야. 아수라장인 침몰선 위에서 영국인이라면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선장의 외침을 이렇게 해석했을 것 같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해라. 그리고 네 할 일을 해라.”

영국인의 국민성은 굳게 다문 입술(stiff upper lip)로 표현된다. 좀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기에 직면해서도 덤덤해 보이(려 애쓰)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고나 할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 때를 담은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어. 폭격에 무너지는 집에서 여동생을 구했다는 한 소년의 사진이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굳게 다문, ‘뭐 이런 일 가지고 사진을 찍고 그래요?’ 하는 표정의 ‘영국인다운’ 꼬마였다. 설마리 전투에서의 영국군들 역시 딱 그런 느낌이었어.

위기 앞에서 침착한 ‘영국인다움’

설마리 전투의 영국군들을 기록한 〈마지막 한 발〉(앤드루 새먼 지음)에는 그런 장면들이 지천으로 나온다. 중공군들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 참호 속에서 한 장교가 부르짖는다. “글로스터여,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 부대의 명예를 지키자.” 그러나 누군가가 이렇게 외친다. “부대의 명예는 개뿔! 그럼 난 나갈래!” 그런데 이 외침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고 해. 나가봤자 별수 없고, 사수해봤자 살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영국인들은 그렇게 웃었다.

6·25 당시 한국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건 중공군의 나팔 소리였어. 중공군은 화력이 약한 한국군을 골라서 파고들었고 중공군의 나팔 소리는 그야말로 묵시록에 등장하는 ‘재앙의 나팔’이었으니까. 완전히 포위된 글로스터 대대에도 중공군의 나팔 소리는 더 이상 음산할 수 없는, 불쾌한 소음이었지. 하지만 그 해결책 역시 영국인다웠단다. 군악대장은 신호용 나팔을 들고 ‘후퇴’를 제외한 모든 신호의 나팔을 불어재껴서 중공군 나팔의 기를 죽이고는 영국군에게 익숙한 노래를 나팔로 연주해 중공군 피리 소리를 침묵시켜버렸어.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하던 영국군이 이내 ‘나팔 분 놈’을 저주할 정도의 맹공격을 당하며 속속 쓰러져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하기 위한 구출 작전이 전개됐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더 이상 구원군이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대대장 제임스 칸 중령의 반응 역시 ‘이런 게 영국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을 선사하기에 충분해. 그는 부하를 불러 담배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한다. 마치 남의 얘기처럼. “그 왜 구원병 온다는 거 있잖아? 그거 못 온다나 봐.” 그리고 글로스터 대대는 ‘알아서’ 탈출 작전을 결행하게 돼. 예하 중대들에 각자도생을 명령하면서 대대장 칸 중령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상자와 함께 고지에 잔류하니 각자 안전하게 철수하기를 바란다.”(〈조선일보〉 ‘백선엽의 6·25 징비록’)

글로스터 대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대대 병력 600여 명 중 죽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생환한 이는 67명(이 숫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뿐이었어. 하지만 ‘영국인답게’ 죽음 앞에서도 침착했던 그들 덕분에 유엔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70만 대군을 밀어넣어 유엔군을 포위·섬멸하려던 중공군의 계획은 맥없이 꺾여버렸다. “현대전에서 단위 부대의 용기가 과시된 가장 뛰어난 사례”라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망 이후 추모의 목소리에 반하여 과거 영국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만행과 폭거를 부인하지 않고 ‘Be British’라는 말에 돋아날 거부감을 이해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글로스터 부대원들이 압도적이고 강력한 적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여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끔찍한 중공군 나팔 소리를 낯익은 멜로디의 나팔 연주로 물리쳐버렸던 침착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들의 다윗 같은 전투가 70만 중공군의 예봉을 꺾어 대한민국의 생존에 일조했음에 감사함을 느끼지. 조문 외교를 가서 조문을 빼먹어 구설에 오른 것은 불만이지만 영국의 한국전 참전 노병에게 깊숙이 허리 숙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가 달가웠던 이유다.

아울러 “대한민국 국민의 취미는 국난 극복”이라는 말처럼 위기와 어려움을 맞아 열정과 용기는 충분히 발휘했으되, 여유를 갖거나 냉철함을 과시하는 일은 드물었던 우리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영국인다움’을 부러워하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떤 절박한 순간에 누군가 “한국인답게 행동하라”고 외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겠니? 한국인답게 ‘빨리 빨리’ 움직이는 것? 생존경쟁의 달인답게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글쎄. 아직은 이것이다 하고 단언할 수 없고, 저마다 그 의미를 달리할 것 같구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국인다운’, 즉 다 함께 공유할 수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공동의 가치를 지니게 되기를 바라본다. “한국인답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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