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26일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일명 ‘라 마나다(동물 무리)’ 집단 성폭행 사건 선고 결과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제주도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 영옥과 해녀들을 물질 장소로 데려다주는 작은 배의 선장 정준이 등장한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영옥과 정준은 사귀기로 결정한 뒤 함께 여행을 떠난다. 긴장한 두 사람은 숙소에서 상대방이 샤워를 하는 동안 연거푸 술을 마신다. 잠시 후 장면이 바뀌고, 식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영옥:그럼 우리 합의 본 거야. 아무 일 없이 그냥 술만 마시는 걸로.

정준:네.

영옥:술 먹고 그러면?

정준:우리 사랑이 모두, 전부, 싹 다 술기운이 되니까.

영옥: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전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선장이 나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런 것도 기억 못 하게 되는 거, 완전 테러.

정준:그니까. 오늘은 깔끔하게 그냥 술만.

여기서 ‘아무 일’이란 물론 성관계를 뜻한다. 영옥은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할 때 말짱한 정신이길 바란다. 정준도 동의한다. 술기운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섹스를 하겠다는 이 커플의 다짐에 속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건 ‘찐사랑’이다.

이 로맨틱한 장면이 다르게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영옥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정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술에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전날 밤 정준과 섹스를 했음을 깨닫는다. 사귀는 사이인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 함께 밤을 보내는 중 일어난 일인데 뭐가 문제냐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 스페인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섹스에 대한 명확한 동의가 없다면, 또는 동의 당시 술에 취해 제대로 판단을 하기 힘든 상태라면, 그것은 강간이 될 수 있다. 지난 8월26일 스페인 의회에서 통과된 일명 ‘온리 예스 이즈 예스(only yes is yes)’ 법안 때문이다.

이 법안의 정식 명칭은 ‘성적 자유에 관한 포괄적 보장법’이다. 여기서 성적 자유란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을 자유를 뜻한다. 줄여서 ‘성적자유법’이라고도 한다. 이 법의 핵심은 성관계에 대한 ‘동의’다. 동의를 따지는 것 자체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성적자유법 이전에도 스페인 형법은 동의 없는 성관계를 금지했다. 문제는 동의가 정확히 정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의에 대한 해석이 판사 재량에 달리다 보니 ‘여성이 다리를 오므리지 않았으니 동의한 것’ 또는 ‘소리 지르고 저항하지 않았으니 동의한 것’ 따위의 비상식적 판결이 나오곤 했다.

스페인에서 성범죄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성학대(abuso sexual)’, 다른 하나는 ‘성폭행(agresión sexual)’이다. 둘의 차이는 폭력과 강압의 유무다.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으면서 물리적 폭력을 쓰면 성폭행(강간), 폭력이 없으면 성학대로 간주됐다. 물론 성폭행 형량이 더 무겁다. 이 중 폭력이 쓰이지 않은 성학대 사건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자주 도마에 올랐다. 가해자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성관계에 저항하지 않은 건 사실상 동의한 것 아니냐는 논리다. ‘반드시 폭력이 있어야만 강간인 건 아니며 때리지 않고도 사회경제적 지위나 다른 정황 조건을 이용해 성관계를 강요할 수 있다’는 반박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발생한다.

2016년 7월7일, 스페인 북동부 나바레주(州)의 주도인 팜플로나에서 남성 다섯 명이 18세 여성을 집단으로 성폭행했다. 스페인의 유명한 소몰이 축제 기간이었다. 이 여성은 밤늦게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남성들에게 붙들려 아파트 건물로 들어갔다. 출구가 하나뿐인 약 3㎡ 크기의 방에서, 여성은 남성들에게 총 6차례 강간을 당했다. 남성들의 나이는 24~27세. 이들 중 한 명은 직업군인, 한 명은 지방 경찰관이었다. 다섯 중 세 명은 전과가 있었다. 사건 직후 지나가던 행인들이 아파트 복도에 혼자 남겨진 여성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튿날 정오쯤 축제 현장에서 남성들이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여성이 성폭행당하는 모습을 촬영했고, 그 영상 7개를 자신들이 속한 와츠앱 메신저 그룹에 공유했다. 그룹의 이름이 ‘라 마나다(La Manada, 스페인어로 ‘동물 무리’라는 뜻)여서, 이 사건은 ‘라 마나다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오직 예스만이 예스” 

나바레 지방법원은 2018년 4월26일, 이들에게 ‘지속적 성학대’ 혐의로 각각 9년형을 선고한다. 왜 형량이 더 높은(12~15년) 성폭력이 아니라 성학대인가. 법원은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촬영 영상에 따르면 이 여성은 자신보다 나이가 6~9세 더 많은 남성 5명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는 동안 계속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수동적 태도를 유지했다. 판결을 내린 판사 3명 중 한 명은 저항하지 않는 게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의미라며 남성 5명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재판 과정에는 가해자들이 고용한 사립 탐정이 제출한 자료도 제출됐다.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뒤 소셜미디어에서 ‘평범한 소통’을 했다는 내용으로, 성폭행이 아니라는 증거로 이용됐다. 성폭행 혐의에서 벗어난 가해자들은 같은 해 6월22일 6000유로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러나 스페인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남성들의 혐의를 성학대에서 성폭행으로 상향 조정한다. ‘피해자가 위협을 당했고 공포에 장악돼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유다. 2019년 7월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하위 법원의 판결은 오류”라며, “오직 명백한 동의, 또는 상황에 근거해 확실히 동의했다고 추론할 수 있을 때만 합의된 성관계라고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가해자들에게 각각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그중 한 명(전직 경찰관)은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훔친 혐의로 형량이 2년 추가됐다. 법원은 또 이들에게 향후 20년 동안 피해자 주변 500m 이내 접근금지 및 10만 유로의 보상금 지급을 명령했다.

대법원에서 혐의와 판결 내용이 바뀌긴 했지만, 라 마나다 사건 및 그 재판 과정은 스페인 전역에서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력과 저항 여부에 의해 성학대, 성폭행으로 성범죄를 단순 양분하는 현행법 개정을 요구했다. 집회에 등장한 구호는 크게 세 가지다. “자매여, 나는 당신을 믿는다” “성학대가 아니라 강간이다”, 그리고 “오직 예스만이 예스다”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호가,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아 새로 제정된 성적자유법의 별칭으로 쓰이게 된다.

2022년 8월25일 스페인 의회에서 찬성 205표, 반대 141표, 기권 3표로 통과된 성적자유법에서 ‘동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보자. “(1)사건의 정황을 고려하여, 당사자의 의견이 (2)명확하고 (3)자유롭게 표현되었을 때만 동의가 있었다고 간주한다.” 명확한 ‘예스’만이 동의이고, 그 외 침묵이나 무저항, 망설임은 동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다리를 오므리지 않았으니 동의한 것’ 따위의 판사 재량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 법안은 또 성학대 항목을 없애고 모든 성범죄를 성폭행으로 단일화했다. 술, 약물, 마약 등으로 인해 명확한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성관계가 있었을 경우, 예전에는 성학대로 처벌받았으나 앞으로는 성폭행이 적용되며 약물 사용 자체가 가중처벌 사유가 된다.

동의 없는 성관계를 이 정도로 엄정히 처벌하는 나라는 유럽에서도 흔치 않다. 스페인 외에는 스웨덴 정도다. 급진적 변화이다 보니 반발도 만만찮다.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 소속의 여성 정치인 카를라 토스카노는 “이 법안의 목적은 여성 보호가 아니라 남성, 특히 이성애자 백인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동의라는 아이디어는 백인 남성을 무너뜨리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1개월의 입법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동의’라는 용어에 혼란이 없도록 그 정의를 수차례 수정, 보완한 점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반대자들은 무죄추정 원칙이 무너지고 입증책임이 피고인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무죄추정 원칙은 여전하고, 피고인들이 스스로 동의를 입증할 책임도 없다. 사실관계는 재판 과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달라진 것은 성관계에 동의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두가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는 점이다.

11개월의 입법 과정 거쳐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당시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이 나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김흥구

동의에 관해 자주 나오는 질문 하나, 연애나 결혼 관계에서도 성관계 시 동의가 필요한가? 그렇다. 실제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스페인 말라가에 사는 한 남성이 집에 와서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했다. 아내가 거부했지만 “이건 네 의무야”라며 아내 머리를 잡고 구강성교와 항문성교를 강요했다. 25년을 함께 산 이 부부의 결혼 생활에는 이미 문제가 많았다. 남성은 아내에게 종종 “돼지” “나쁜 엄마” “쓸모없다”라고 말하며 모욕했다. 대법원은 2019년 이 남성에게 성폭행 혐의로 9년, 학대 혐의로 9개월의 징역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에 이렇게 명시했다. “성적 행위를 제공받을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이나 연애 관계가 상대의 성적 자유를 넘어서는 어떤 권한도 부여하지 않는다. 강제로 파트너와 섹스하는 것은 강간이다. 커플 사이의 강간을 부인하는 것은, 결혼이 당사자들의 성적 자유의 무덤이라고 단언하는 것과 같다.”

또 다른 질문, 동의를 철회할 수 있는가? 그렇다. 스페인 살라망카 지방법원은 2019년 4월 섹스 중에 상대의 동의 없이 콘돔을 제거한 남성에게 성학대 혐의로 216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하고 보상금 900유로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콘돔 사용이라는 전제 조건하에 성립된 성관계 동의는, 이 조건이 변했을 경우 무효가 된다. 투명한 정보 제공은 동의의 필요조건이다. 만약 이 사건이 지금 다시 재판에 회부된다면 이 남성에게는 성학대가 아닌 성폭행 혐의가 적용돼 형이 더 무거워질 수 있다.

얼마 전 일어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은 범죄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여러 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남자 직원이 한 것 같다”라는, 이상훈 서울시의원의 가해자 옹호 발언도 끔찍한 수준이었다. 관계의 출발점으로서의 동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는 건 그만이 아닐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말짱한 정신으로 동의하에 섹스를 하겠다는 영옥과 정준은 얼마나 성숙한 사람들인가. 참, 이들은 대화 중 술이 깨고 위 에피소드는 ‘예스 이즈 예스’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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