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작품 속 ‘주인공’과 작품을 쓰는 ‘작가’가 한 건물에서 만난다고 상상해보자. 둘이 만나야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디서 만날까? 출입문이나 엘리베이터 앞, 혹은 비상계단?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은 글을 쓰는 일을 자주 ‘건물’에 비유했다. 그는 자신과 시나리오 속 인물이 만나는 곳을 아주 깊은 지하실 혹은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다락방이라고 말했다. 글을 쓰는 ‘고된 일’은 구석진 지하실이나 다락방에 도착하기 위해 한참을 헤매는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 인적 드문 낯선 방에서, 작가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를 만났다. 해준은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행복한” 형사다. 동시에 원자력발전소의 안전관리자인 부인(정안)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규칙적으로 섹스를 한다. 그는 야만과 문명 사이의 질서를 지키는 경계인이다. 서래는 살인자, 아니 살인 용의자다. 남편이 실종되고 사흘 만에 실종신고를 하곤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남편이) 하루만 연락이 안 돼도 신고하나요?” 이방인 서래는 한국에서 만난 첫 번째 남편(도수)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고 “가축처럼 몸에 (남편의 이니셜로) 낙인까지” 찍힌 채 살았다. 사극 드라마로 한국어를 배운 그는 오타를 남발하는 두 번째 남편(호신)과 달리 정확한 맞춤법을 쓴다. 서래의 저녁밥은 온기가 없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다.

정서경 작가의 가장 오랜 파트너는 영화감독 박찬욱이다. 두 사람은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까지 작품 다섯 편을 함께 썼다. 박 감독은 “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 동화적인 아름다움, 낙관주의, 설렘, 감사하는 마음, 쓸데없는 공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게서 비롯한 것이다”(〈친절한 금자씨 각본〉 서문)라고 말했다.

8월25일,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정서경 작가를 만났다. 8월 출간된 〈헤어질 결심 각본〉이 출간 일주일 만에 11쇄를 찍고 3주째 인터넷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의 여운이 각본집 소장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진 가운데 정서경 작가와 〈헤어질 결심〉을 다시 펼쳤다. 창작자로서 그가 서사와 인물을 만드는 과정도 물었다. 활자로 만나는 〈헤어질 결심〉은 숙련된 글 노동자가 단단하게 쌓아올린 ‘건물’로 다시 보였다(이 기사에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이미지에서 시작했나?

박찬욱 감독이 ‘남편을 두 번 죽인 여자에 대해서 써보자’고 제안했는데 자연스럽게 산이라는 배경이 떠올랐다. 이미지가 있었다. 가을 산, 그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인이 불분명한 등산복 입은 남자(시체). 그를 죽인 여자에게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울면서 산에 올라가는 것까지. 이 이미지들이 너무 좋았고, 산에서 시작했으니 그다음 사건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하강구조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본 안에 자연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됐는데, 자연에 대해서 쓰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는 몰랐다. 늘 머릿속에 산과 바다를 떠올렸다. 작업실 창 너머로도 남산이 보이는데, 작업실에 올 때마다 매일 산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오늘은 스위스 산 같군’ 이런 식으로.

서래도 한국에 자기 산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위로받는다.

사실 나도 산이 하나 있다. 30년 전에 아버지가 기획부동산에 속아서 샀던 산이다(웃음). 그때 같이 사기를 당한 분이 병환이 생기고 나서 아버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서 산을 사달라고 했다. 고민하시기에 내가 그 산을 대신 샀다. 그런데 산이 있다는 게 나쁘지 않더라. 집에 산이 두 개니까, 아들들 이름을 하나씩 붙여놓고 ‘오늘은 산이 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 서래한테 산이 있다면 한국에 올 이유가 될 것 같았다. 인간이 산에 대해 갖는 감정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동물적 감각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렇게 자신의 산에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보내고 나면 한국에 온 서래의 여정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시나리오는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1부, 이포를 배경으로 한 2부로 나뉜다. 사건은 동일하다. ‘한 형사(해준)의 관할 지역에서 어떤 여자(서래)의 남편이 죽는 이야기’다.

1부와 2부는 거울이다. 이를테면 해준이 1부에서 썼던 애플워치를 2부에서는 서래가 쓴다. 해준이 애플워치를 쓰도록 설정한 이유는 자기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절대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해준이 말하려는 속마음은 자기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결코 말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다. 그래서 녹음장치를 떠올린 거다. 그게 서래에겐 그렇게 다정할 수 없는 물건이었고. 그래서 2부에서는 서래가 그 물건을 이용해 해준을 기록한다.

그 외에도 1부에서는 해준의 파트너가 수완이었지만, 2부에서는 연수로 대체된다.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으면 저절로 연결되는 장치들이 있는데, 이럴 땐 작가가 뭘 복잡하게 정해두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물들이 사건들 안에서 알아서 움직인다. 나도 써지는 대로 놔둔다.

‘인물들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말은, 작가가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나는 내 캐릭터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른다. 배우를 통해 인물이 살아 움직일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나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대신 몇 가지 사실들을 미리 정해둔다. 예를 들면, ‘서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꼭 들어가야 하는 사실이다. ‘어쩌면 서래는 한국에서 첫 남편을 죽이기 전에 이미 다른 남편을 죽여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것들을 모은다. 이게 모이면 경향성이 돼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서래는 아마도 자긍심이 강한 인물일 것 같고,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겐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무뚝뚝할 것 같다.

해준의 경우는,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남자’라는 박찬욱 감독이 원하는 디테일이 있었다. ‘해준은 요리를 잘할 것이다’ ‘해준은 유용한 기술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그가 어떤 인물일지 머릿속에 그려둔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왼쪽)은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행복한” 형사로, 서래는 살인 용의자로 나온다. ⓒCJ ENN

서래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커 보인다.

탕웨이 배우와 서래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연기를 한 배우에게도, 글을 쓴 작가에게도 어떻게 이렇게 서래는 감동적일 수 있을까. 그러다 이 장면을 찾아냈다. 서래가 신문실에서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괜찮아요”라고 세 번 말하는 장면. 상처를 다가와서 봐도 괜찮고, 사진을 찍어도 괜찮고,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봐도 괜찮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서래는 단 한 번도 괜찮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대한 수동성’을 가진 인물인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인물에게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래에게 헤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죽거나, 타인을 죽여야만 가능한 행위다.

서래의 성격과 죽음의 방식이 닮았다.

서래는 바다 모래를 양동이로 파서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다. 그 죽음의 방식을 보고 많은 관객들이 ‘아, 저 사람은 내 마음속 어떤 감정이라도 가져갈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다. 서래는 마치 샤먼, 무당이나 대속하는 예수처럼 종교적인 인물이다. 그가 땅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갖고 있던 그리움과 슬픔까지 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묻히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관객들은 주인공이 ‘되어’ 슬퍼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안쓰러워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감정이다.

탕웨이 배우와 서래 사이에 공통점이 있나? 서래를 ‘정확하게’ 완성시켰다.

탕웨이 배우는 상자 같다. 안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 모르는 상자. 모든 걸 받아들여 꾹꾹 눌러 담는 상자. 그런데 사실 탕웨이 배우는 여왕이다(웃음). 뚜벅뚜벅 걸어와서 척, 하고 악수를 청하는데 그 모습을 정말 좋아한다. 시력이 5.0은 돼서 넓은 평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 처음 탕웨이 배우를 캐스팅하고 나서, ‘너무 기뻐서 15년 충무로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가까이 오라고 하고는 안아주더라. 근데 보통은 자기가 다가와서 안아주는 거 아닌가? 포옹을 하사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너에게 축복 같은 포옹을 주리라(웃음).’ 그러면 우리는 또 너무 겸손하게 포옹을 당하는 거다. 그런 사람이다.

한 인터뷰에서 해준의 불면증을 ‘죽음과 가까워지는 모습’에 비유했다.

박찬욱 감독도 불면증이 있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영화가 다 만들어진 이후에도 깊게 잠을 자지 못한다. 양을 밤새 지켜야 하는 양치기가 숙면을 할 수 있겠나? 해준도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킬 게 있는 사람이니까 예민하게 깨어 있지만, 자기를 돌볼 에너지가 없어서 잠을 못 자는 사람. 그런데 영화를 보니 이건 죽어서 완전히 바닥에 누워야 끝나는 불면인 거다. 잠에 끝없이 가까워지려는 그 모습이 또 다른 수평 행위인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해준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내면의 야생성과 생명력을 잃었고 그게 해준의 존재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그런 해준을 구제해주는 인물이 문명 밖, 야생의 세계에서 온 서래다. 그래서 나는 서래가 죽으면서 해준의 생명을 회복시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엔딩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해준은 불면증이 사라졌을 거다.

맨 왼쪽부터 영화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의 각본. ⓒ교보문고

박찬욱 감독 별명이 ‘배운 변태’다. 정서경 작가도 닮은 취향이 있나?

아니다. 한국 관객들과 박찬욱 감독 사이에는 비밀 협약이 있다. 박 감독 작품은 이상해도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걸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기도 하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왜 저한테 연쇄 살인범 시나리오를 주시는 거죠? 저는 지브리 좋아해요” 이렇게(웃음). 농담이 아니다. 나는 정말 스튜디오 지브리(〈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제작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같은 작품을 하고 싶다. 슬프고 회복되지 않는 뭔가가 있는 그런 이야기.

그런 것치곤 폭력적인 장면을 너무 잘 그린다.

쉽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우정에 대해 말하려면 많은 것들을 쌓아서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칼로 찔리는 폭력을 보면 우리 뇌가 번개처럼 그게 뭔지 안다. 다 같이 즉각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감독은 다른 사람들과 살갗 밑의 통증을 공유하고 그걸로 소통하려고 했던 거다. 감독의 언어가 〈올드보이〉 같은 파충류의 방식에서 〈헤어질 결심〉처럼 운명적인 감정을 느끼는 멜로에 이르기까지 발달 단계를 거쳤다고 본다.

하루 목표량을 정해놓고 글을 쓰나?

글쓰기는 암벽등반과 비슷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가야지 하고 오전에 목표를 정해두고 다양한 루트를 점검한다. 오늘은 이만큼을 이렇게, 안 되면 내일은 이만큼을 저렇게. 아, 그런데 최근에 엄청난 발견을 했다. 이렇게 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일상적인 몇 가지 루틴들을 하기 전에 딱 다섯 줄만 쓰는 거다. 씻기 전에 다섯 줄, 산책하기 전에 다섯 줄, 식사하기 전에 다섯 줄. 이렇게 다섯 줄씩만 모아도 엄청 모을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최근에 마감을 잘 마쳤다.

새가 모이를 모아 먹는 느낌이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우리 뇌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내보낸다. 어제 만난 그 사람은 성격이 왜 그럴까부터 시작해서 어렸을 때 일, 내가 왜 그때 그 음식을 좋아했을까 이런 것까지.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떠오르면 ‘안 돼, 집중해서 일하자’ 이런다. 그게 안 되면 ‘나는 망했어, 나는 게을러’ 이러면서 좌절한다. 근데 그냥 이런 생각들이 다 지나가야 한다. 건물로 따지자면 제일 밑에 있는 지하실이거나 꼬불꼬불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다락방까지 가야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대문을 넘어 추억의 방, 분노의 방, 걱정의 방을 다 지나야 한다. 주로 오전에 하는 게 이런 일인 것 같고 오후에는 그 방을 다 지났기 때문에 쓸 수밖에 없다. 캐릭터와 나 자신만 있는 그 방에 들어가면 글이 시작된다.

9월3일에 방영되는 〈작은 아씨들〉은 두 번째 드라마 작품이다. 여성 배우들과 여성 제작진이 눈에 띈다.

백두대간 같은 굵은 이야기와 나무 잎맥처럼 섬세한 이야길 함께 담고 싶었다. 재밌을 것 같다. 내가 긍정적인 성격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아주 부정적인 성격이었어도 ‘재밌을 거’라고 말했을 거다(웃음). 실제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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