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연방 대법원 앞에서 임신중지권 폐지 판결을 규탄하는 미국 시민들. ⓒUPI

미국이 ‘보수 공화국’으로 돌진하나? 최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임신중지)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판결을 약 50년 만에 공식 폐기한 뒤 미국의 많은 이들이 요즘 던지는 최대 화두다. 현재 연방 대법원은 보수 판사 6명, 진보 판사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보수 판사가 압도적인 데다 대법관이 종신직임을 고려하면 미국 사회의 보수화는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연방 대법원이 임신중지권 폐지에 이어 피임, 동성 성관계, 동성결혼, 인종 간 결혼, 소수계 투표권 등과 관련해 이미 확립된 판결까지 뒤엎을 수 있다는 우려가 친민주당 유권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이들은 해당 판례마저 폐기하면 미국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제14조가 발효된 1868년 이전의 ‘암흑시대’로 복귀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미 그런 조짐이 하나둘씩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6월24일 연방 대법원이 헌법에 임신중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임신중지권을 보장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6대 3으로 뒤집은 지 사흘 만에 이번엔 정교분리의 원칙을 허무는 듯한 판결을 내렸다. 2008년 한 공립고등학교 풋볼 코치가 팀이 승리하자 경기장으로 50야드(약 45m)를 걸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수들과 함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후 학교 당국의 만류에도 그가 경기 때마다 이 같은 행위를 계속했고, 결국 2015년 해고됐다. 그러자 그 코치는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대법원은 학교 당국의 처사가 헌법상 표현 및 종교 자유권을 침해했다며 이번에도 6대 3으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방 대법원은 임신중지 관련 판결을 내리기 하루 전날엔 공개적인 장소에서 총기 휴대를 금지한 뉴욕주법이 총기 소유권을 보장한 수정헌법 제2조에 위배된다며 6대 3으로 폐기 명령을 내렸다.

6명의 보수 판사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임신중지권 폐기 판결과 관련한 보충 의견에서 피임과 동성애, 동성혼을 인정한 기존 대법원 판례를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판결문을 작성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이번 판결로 임신중지와 관련 없는 다른 판례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선 안 된다”라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 역사상 연방 대법원이 지금처럼 보수화된 적은 찾기 힘들다.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 당시까지만 해도 연방 대법원은 보수·진보 판사가 각각 4명으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보수 성향의 데이비드 수터(2009년 은퇴), 앤서니 케네디 판사(2018년 은퇴)가 사안에 따라 스윙보트 역할을 해오며 일종의 안정판 작용을 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같은 구조가 완전히 깨졌다. 2016년 3월 당시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메릭 갈런드 판사(현 법무장관)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지만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인준을 끝내 거부했다. 결국 그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이 진보 판사 갈런드 대신 닐 고서치 판사, 은퇴한 케네디 판사 후임으로 브랫 캐버노 판사를 기용해 연방 대법관 구조를 보수 5, 진보 4로 재편했다.

당시만 해도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스윙보터 역할을 하며 그런대로 균형을 잡았다. 2020년 9월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대표적 진보 판사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트럼프는 곧바로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했다.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지명 후 한 달 만에 그를 초고속으로 인준했다. 연방대법관의 구성이 보수 6, 진보 3으로 급격히 재편되는 순간이자 미국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때부터 임신중지권 폐지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판결을 두고 친공화당 인사들이 ‘트럼프의 승리’라고 치켜세우는 것도 그래서다.

임신중지 허용 주 vs 임신중지 금지 주

임신중지권 폐지 이후 미국 전역에서 극심한 혼란상이 펼쳐지고 있다. 〈블룸버그 뉴스〉에 따르면 이번 판결로 약 3300만 가임여성이 자신이 사는 주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수 없게 된다. 50개 주 가운데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는 동부의 뉴욕·메릴랜드,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16개 주와 수도 워싱턴 DC뿐이다. 반면 텍사스·위스콘신·켄터키를 포함해 13개 주는 대법원 판결과 동시에 임신중지 금지령을 발효했다. 임신중지권 옹호 단체인 구트마허 연구소는 대법원 판결로 이들 주를 포함해 약 26개 주가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번 판결 직후 온라인으로 임신중지 알약을 구입하려는 여성들이 폭증했다. 텍사스, 사우스다코타를 포함한 일부 주에선 조만간 주민의 원정 임신중지 시술은 물론 임신중지 알약 구매까지 금지시키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에 맞서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일부 진보 성향의 주는 다른 주 여성의 임신중지 시술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해 임신중지 반대 주와의 정치적 긴장감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제한돼 있다. 삼권분립이 확고한 미국에서 대통령이 연방 대법원 판결에 간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론은 임신중지 찬성이 60%에 달해 이번 판결에 부정적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다른 주에서의 임신중지 시술에 재정지원을 하고, 임신중지가 금지된 주에 연방 시술소를 운영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부정적이다. 오히려 오는 11월 의회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해 임신중지 허용에 관한 입법을 발효시키는 것을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기는 듯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올가을 선거에 여러분이 임신중지권은 물론 개인의 사생활, 자유에 관한 모든 걸 투표하면 된다”라며 직접 국민에게 호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입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바이든의 해법도 최종 해결책은 아니다. 공화당이 상하 양원 중 하나만 장악해도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론 보수 6, 진보 3으로 고착된 연방 대법원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향후 미국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는 피할 수 없다. 임신중지 폐지 판결은 그 시작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