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일 미국에서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지지하는 이들이 대법관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EPA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최대 ‘적’은 공화당이 아니라 연방 대법원인가? 최근 연방 대법원이 바이든 행정부에서 야심차게 추진해온 핵심 국정 목표는 물론이고 진보적 가치가 담긴 어젠다를 잇달아 물거품으로 만들자, 진보 진영의 분노가 높아지고 있다.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의 임기를 제한하고 보수 판사로 치우친 대법원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민주당 내에서 나오고 있다.

연방 대법원은 1960년대 후반 이후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 소수인종 출신의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 특전을 제공해온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에 제동을 걸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팬데믹 위기로 학자금 대출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최대 2만 달러까지 탕감해주려던 계획도 좌절시켰다. 또한 동성애 커플을 위한 결혼 전용 웹사이트 제작을 거부해 소송을 당한 그래픽 디자이너의 손을 들어줘 성소수자 커뮤니티로부터 공분을 샀다. 지난해 6월에는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1973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판사 중 6명이 공화당 행정부 때 임명되었다. 이들 가운데 3명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행정부 시절 임명됐다. 현재 대법원장을 포함한 보수 성향 판사 6명 대 진보 성향 판사 3명으로 분류된다. 보수 판사는 모두 공화당 행정부 시절 보수 이념에 맞게 철저한 검증을 거쳐 발탁되었다.

1991년 취임한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75)을 필두로 2006년 1월 취임한 새뮤얼 얼리토(73), 2005년 9월 취임한 존 로버츠(68) 대법원장, 이어 2017~2020년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임명된 닐 고서치(55), 브렛 캐버노(58), 에이미 코니 배럿(51) 대법관 등 6명이 보수 판사다. 반면 진보 판사는 2009년 8월 취임한 소니어 소토마요르(69), 2010년 8월 취임한 엘리나 케이건(63), 2022년 6월 취임한 커탄지 브라운 잭슨(52) 등 3명이다. 연방 대법관 임기가 종신직임을 감안할 때 지금의 6대 3 구조는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보수 중심의 대법원이 기존 진보적 판결을 번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진보 진영에 팽배하다.

연방 대법원이 보수 진영 입맛에 맞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자 대법원이 사실상 ‘정치화’되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대법관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이 싸늘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보수 판사와 진보 판사 간에 절묘한 균형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던 2000년 이전만 해도 연방 대법관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신뢰도는 60%로 높았다. 하지만 최근 40%로 뚝 떨어졌다. 특히 같은 기간 대법관에 대한 불만도는 29%에서 53%로 껑충 뛰었다. 최근 퀴니팩 대학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대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 자신의 정치적 편향에 좌우된다고 답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연방 대법원의 ‘정치화’가 본격화한 시점을 2016년 2월 당시 보수 판사였던 앤터닌 스캘리아 판사가 사망한 때로 본다. 당시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는 “미국 국민은 차기 대법관 선정에 관여해야 하며, 따라서 차기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후임을 채워선 안 된다”라며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에 경고했다. 그해 11월 대선이 끝날 때까지 상원 인준 청문회를 개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메릭 갈런드 연방 고등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상원에 인준을 요청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거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트럼프 후보는 이듬해 취임 후 갈런드 후보 대신 보수 이념에 투철한 닐 고서치 대법관을 발탁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대법원 진보 진영의 좌장 역할을 해온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2020년 9월 사망하자 트럼프는 곧바로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 고등법원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매코널은 인준 청문회를 열어 속전속결로 인준했다. 대선을 불과 일주일 남긴 시점이었다. 4년 전 갈런드 지명자에 대해선 대선 때까지 인준 청문회를 거부했는데, 2020년 대선을 앞두고는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자 대선을 일주일 남겨놓고 일사천리로 인준 청문회를 개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후보 시절, 당선하면 대법관 증원 문제를 공식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AP Photo

대법관 인준 청문회 시기, 그때그때 달라요

이처럼 보수 판사 중심의 대법원이 바이든 행정부의 국정 수행에 걸림돌로 작용하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물론 진보 단체들까지 행동에 나서고 있다. 연방 대법원이 바이든 대통령의 학자금 대출액 탕감 계획을 저지한 직후인 6월 하순에 돈 바이어 의원은 종신직인 대법관 임기를 18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다시 내놓았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이 임신중지권을 뒤집는 판결을 내린 뒤에 발의된 바 있는데, 그때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민주당 내에선 대법관 임기 제한이 아닌 증원에 오히려 관심이 더 많은 편이다. 민주당 의원 100명 이상이 가입한 ‘진보의원 코커스’는 대법관을 최대 15명으로 증원하는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가족계획연맹’ 같은 전국적 규모의 진보 단체들, 인권운동가 알 샤프턴, 마틴 루서 킹 3세까지 이런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이 같은 움직임에 부정적이다. 그는 학자금 대출 탕감안이 연방 대법원에 의해 거부된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 대법원은 정상적인 법원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도 “대법관 정원을 늘리면 건강하지 않은 쪽으로 대법원이 정치화될 것”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바이든은 2020년 후보 시절, 대통령에 당선되면 대법관 증원 문제를 공식 검토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취임 후 대법관 증원 검토위원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2021년 12월 294쪽짜리 보고서를 바이든 대통령에게 제출했는데, 바이든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고 대법관 임기 제한과 증원을 지지해온 캐럴라인 프레드릭슨 조지타운 대학 교수(법학)는 〈워싱턴포스트〉에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법원이 급진적 행동 방식으로 마치 군주처럼 행동하고 민주주의를 크게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대법원의 최근 잇따른 판결은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시키고 있다”라고 밝혔다.

대법관 임기와 증원에 대해 이러저런 말이 나오지만 법안으로 이를 구체화하기는 쉽지 않다. 민주당이 관련 법안을 발의해도 의회 통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민주당이 행정부와 상하원을 모두 장악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방 대법원이 보수적 판결을 내놓을 때마다 별다른 해법 없이 이 같은 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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