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오른쪽)가 4월13일 방송 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한국 사회에서 때아닌 ‘문명’과 ‘비문명’ 논쟁이 번졌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시위를 반복적으로 ‘비문명’이라고 비난한 탓이다. 그는 전장연이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해야 본인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와 전장연 사이의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그는 재차 전장연의 시위 방식을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단언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집단의 요구사항은 100% 관철”시킬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여기서 ‘특정 집단’은 물론 전장연, 혹은 그가 판단하기에 전장연과 비슷한 부류의 ‘비문명’ 단체들을 뜻한다.

‘우리 사회’와 ‘특정 집단’ 또는 ‘선량한 시민’과 ‘불법 시위꾼’ 사이의 대립 구도가 낙인과 배제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위를 하더라도 준법정신은 투철한, 말 그대로 ‘착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한국 사회에서 유독 심하다. 외신들이 문자 그대로 “예의 바른” 저항이라고 보도했던 촛불시위의 기억 때문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런 외신 보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착실하게 촛불을 들어봤자 그 누구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자신들의 몸과 삶에 구조적 차별과 부정의가 깊이 각인된 사람들, 그래서 생존 자체가 위협받아도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내일의 삶을 살아갈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라고 말하며 이제 그만 적당히 하라고 한다. 2022년의 대한민국 같은 ‘문명’사회에서, 죽기 전에 단 하루라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비문명’이기 때문일까?

한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 작동하지 않는지, 법과 제도가 누구를 차별하고 배제하는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누가 먼저 죽어가는지, 그 한계를 가장 먼저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와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들은 굳은 마음을 먹고 자신의 삶을 증언하려 하지만, 시위를 통해 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불법 시위’나 ‘폭력 사태’와 같은 프레임으로 제지당하는 때가 대부분이다. 아예 집회의 이유와 목적이 자세히 보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겪어온 부정의한 조건이 무엇인지 공론화되기도 전에 불법·폭력·비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손쉽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비문명’으로 간주되어 협상의 대상조차 아닌 것일까? 왜 전장연이 아닌 다른 ‘적법한’ 장애인 단체와의 만남이나 논의가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질까? 정책적 협상과 조정의 우선순위는 어떤 기준으로 누가 정하는 것일까. 가난과 재난 앞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복지정책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은 누구일까. 정책가와 입법자들이 “우선순위에 따라 단계적으로” 법을 제정하거나 예산을 배분할 때, 그 우선순위와 시기적 단계를 결정하는 논리는 무엇일까.

자격 조건의 위계와 ‘바람직한 주체’ 경쟁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3월28일 서울 경복궁역에서 출발해 혜화역까지 가는 ‘제25차 출근길 지하철을 탑니다’를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

정책의 설계 및 집행은 한 국가의 통치 원리를 반영한다. 정책적 수혜의 대상은 당연히 그 통치 원리에 부합하는 사람들이다. 일찍이 정책 연구자들은 공공정책의 ‘수혜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집단은 수혜를 받을 만한 마땅한 ‘자격을 갖춘’ 이들로 구별되는 반면, 다른 집단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수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로 분류되어 정책적 혜택 바깥에 줄 세워진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즉, 공공정책인데도 불구하고 각 정책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돌보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건전한 시민적 주체’만 지원하고 그렇지 않은 이를 제외하는 것을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 빈부격차와 전 지구적 재난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격’이 없다면 국가는 그들을 구할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제한다. 국가 통치와 기존 시스템 유지에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도 미국의 재난관리청이 이재민을 구별 짓는 방식일 것이다. 수년 전 캘리포니아에 역대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을 때 이야기다. 캘리포니아의 가뭄과 화재는 더욱 빈번해지고 있지만, 2018년에는 지난 100년 중 최대 손실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산불 피해가 심각했다. 무려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대피해야 할 정도였으니, 그 지역이 초토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서 대형마트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살아야 할 만큼 대피 시설이 부족하기도 했다. 화재가 지나간 뒤 시간이 흐르면서 텐트촌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고, 거대한 자연재해로부터 스스로를 자력으로 구제할 수 없는 가난한 취약계층만 남았다. 재난관리청은 이들을 돕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당한 모든 이재민을 조건 없이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 아닐까?

그러나 미국 재난관리청은 텐트촌에 남겨진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원래 “홈리스(homeless)였으므로”, 당시 노숙자였던 이들이 지금도 노숙자인 것은 당연하며 그들이 처한 상황은 온전히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는 논리를 폈다. 애초에 노숙자인데 산불 피해 지역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그들을 보호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난관리청은 이재민들에게 피해 접수를 받으면서 주소를 명기하도록 했고, 정확한 거주지 등록이 확인되지 않으면 지원 절차에서 탈락시켰다. 그러므로 노숙자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룸메이트나 동거인으로 ‘얹혀살던’ 가난한 이민자들도 자연히 정책적 지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현대 ‘문명’사회에 심지어 집주소도 없는 이들은 건전한 시민, 혹은 바람직한 주체가 아니므로 국가가 설정한 ‘자격 조건의 위계’에서 밑바닥에 놓인 ‘비문명’일 뿐이었다. 이들은 국가 질서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효율이자, 보기 흉한 텐트촌을 만들어 ‘모범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이들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이재민의 지위조차 부여받지 못한 것이다.

2018년 11월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콘카우 마을에서 대형 산불 피해 주민들이 월마트 매장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대피 중이다. ⓒXinhua

정책적 지원과 구별 짓기를 통해 ‘착실한 모범 시민’을 가려내고 양성하는 것은 가부장 국가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본 수칙이다. 시민으로서의 자격은 모두에게 주어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불평등하게 배분되어야 국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기득권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 미국 공공정책의 역사는 이 같은 ‘자격 조건의 위계’가 어떻게 관리되어왔는지 뚜렷이 보여준다. 이른바 정상 가족이나 신혼부부에게 우선권을 주는 주택정책은 성소수자를 효과적으로 배제해왔다.

‘복지 수혜의 여왕(welfare queen)’이라는 허구의 존재를 만들어 마치 흑인들이 각종 복지 혜택을 악용해 부정 수급을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흑인 빈곤계층은 ‘자격 없는’ 이들이며 더 이상의 정책적 지원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적장애인들을 사회적 위험으로 지칭하며 범죄자와 동일한 범주로 묶어서 관리하기도 했다. 이들은 단순히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배제된다. 탈시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명’과 ‘비문명’의 갈라치기는 자격 조건의 위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불량 시민’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정책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이 고통받는 장애인이라도 ‘착실한 장애인’만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자격 조건의 위계, 그리고 그 위계 속에 자리를 잡기 위한 ‘바람직한 주체 경쟁’은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이길보라 감독은 〈당신을 이어 말한다〉에서 그의 10대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은 바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경험을 쌓기 위해 배낭여행을 가겠다”라고 했더니 장학금이 바로 끊겼던 사례다. 장학금을 받기에 ‘바람직한’ 학생이라면, 고생하는 농인 부모를 늘 곁에서 모시는 효녀이자 모범생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잣집 자녀도 아니고 부모가 장애인인 주제에 감히 해외여행을 가겠다니? 그렇게 그는 모범생의 범주에서 탈락하고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철없는 10대가 되고 말았다. 주어진 자리에서 탈선하지 않는, 말 잘 듣는 주체를 훈육하려는 영락없는 가부장의 손길이었다.

국가정책은 보편적 정의를 추구해야

‘문명’과 ‘비문명’ 사이에는 몇 단계의 위계가 있을까. 당신은 그 서열에서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가. 사실 누구든 갑작스러운 질환을 얻어 거동이 불편해질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거나, 뜻하지 않은 경제 상황으로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레 떠나보내고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매일 아침에 출근하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바람직함의 위계에서 곤두박질치거나 낙오될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생산적이고 정상적인 시민들을 우선 배려하는 효율의 논리는 결국 우리도 그 시스템의 눈 밖에 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가의 경제 상황과 정부의 정책기조에 따라 우선순위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기도 하다. 남성들만 가득한 정부가 만들어내는 정책은 어떠하겠는가?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정책이 축소되거나 삭제되면 결국 그 협소한 자원은 ‘바람직한 주체’들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에서 바람직함의 위계 최상단에는 아마도 모성·출산·양육 같은 가치들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과 비교, 그리고 바람직한 주체의 구별 짓기가 악화되는 것은 기후위기, 전 지구적 재난,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 우리의 생존을 더욱 위협할 뿐이다. 이제 정책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의미의 보편을 생각할 때다. 오래전 철학자들처럼 ‘남성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이 곧 ‘보편’이라고 말하던 그런 일방적 의미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모두가 전적으로 평등하며 존엄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각자의 몫과 사회적 조건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편적 정의 개념을 제안한다.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는 서로의 ‘바람직함’을 비교하거나 서열화할 필요가 없는 사회다. 그리고 모든 이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조건의 부족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사회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이들이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가와 공동체의 역할 아닐까? 이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지원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법학자이자 정책 연구자인 존 파울은 선별과 보편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구성원 모두가 보편적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집단별로 다양화된 정책을 수립하는 모델이다. 그 누구도 선별의 이름으로 특별히 선택되거나 배제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정책적 지원을 받는 형태다. 누군가를 불법과 비문명이라 호명하며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삭제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 누구도 낙오시키지 않는 사회가 우리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이며, 모든 이들의 존엄한 삶이 보장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적 풍요를 경험할 것이다.

※이번 호로 ‘2022, 삶을 위한 전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김정희원 선생님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김정희원 (애리조나 주립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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