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은 법경제학자 린 스타우트 교수(위)가 2018년, 60세의 나이에 암으로 숨진 날이다. ⓒWikipedia

4월16일은 법경제학자인 린 스타우트 교수가 2018년, 60세라는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사회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한 학자였다. 주주만을 중심으로 기업을 바라보는 견해를 비판하고, 기업의 역할을 사회적 이슈의 해결 주체로까지 확장시켰다. 더 나아가 ‘시민 자본주의’의 시대를 열자고 제창했다.

케케묵은 질문으로 시작하자.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 답변은 ‘주주(shareholder)’다. 그렇다면 기업의 목적은 주주의 부를 늘리는 것(주가 극대화)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사상을 ‘주주 우선주의(shareholder primacy)’라고 부른다.

주주를 주인으로 대접해줄 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가 잘되는 것이 주주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업은 자사가 벌어들인 매출액을 어떻게 배분하는가? 먼저 원재료 값과 임금을 지급한다. 그다음엔 빌린 돈의 이자를 채권자들에게 갚는다. 또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한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친 뒤 남은 돈이 비로소 주주들 차지가 된다. 주주는, 기업이 갚아야 할 돈을 모두 갚고 남은 나머지에 대해서만 청구권을 갖는 셈이다. 주주를 ‘잔여 청구권자(residual claimer)’라 부르는 이유다. 원재료 판매업자, 노동자, 채권자 등은 자신이 받을 돈만 받을 수 있다면 기업가치가 크든 작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주는 기업가치가 클수록 더 큰 이익을 얻는다.

■ 주주 우선주의의 문제점

그러나 스타우트는 이러한 주주 우선주의가 옳지 않으며 수많은 문제점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스타우트에 따르면, 미국의 기업법(Corporate law)은 경영진에게 ‘주주의 부를 극대화하라’고 의무로 강제한 바 없다. 더욱이 기업은 법인으로서, ‘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다. 주주가 법인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주주가 기업의 주인’이란 말은, 단지 주주들이 해당 기업 주식을 보유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주주와 기업은 어떤 법적 계약을 맺고 있는 것이지, 전자가 후자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당신이 삼성전자의 주주라고 해서 마트에 전시되어 있는 갤럭시폰이나 삼성 TV를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주주라고 해서 그 회사의 임직원이나 협력업체 직원, 또는 채권자들과 특별하게 다른 법적 지위를 갖는다고 볼 이유는 없다.

주주가 ‘잔여 청구권자’이므로 기업의 주인이라는 견해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업이 파산한 경우라면 채권자들에게 빚을 모두 갚고 난 뒤 잔존 가치만 주주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파산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지 않다. 이때 주주들에게 돌아갈 몫은 이사회가 결정한다. 이처럼 스타우트가 오래전부터 비판해온 주주 우선주의의 부작용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경영자들이 단기적 주가 부양에 매달리다가 기업의 장기적 성장성을 희생시키는 등의 부작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부의 불평등 심화 같은 거시적 문제점도 있다. 주주 우선주의는 주주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강화시켜 기업에 좀 더 직접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2010년 4월, 멕시코만에서 BP의 석유시추선이 폭발해 원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AP Photo

2010년 4월, 멕시코만에서 정유회사 BP(British Petroleum)의 석유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호가 폭발해 시작된 원유 유출 사고는 역사상 최악의 환경 재난으로 기록됐다. 노동자 11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후 5개월 동안이나 원유가 유출되었다. BP는 당초 사고 수습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기 배당금 지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주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재빨리 결정을 번복해 배당 지급을 재개했다. 대신 수많은 원유 산지를 포함한 300억 달러 규모의 자산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이해관계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금 마련이 시급한 상황에서도 배당을 지급하고 그 대신 기업자산을 매각해 장기적으로 기업가치에 해를 끼친 것이다. 스타우트는 이를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주주만은 보호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주 우선주의가 작동한 사례로 제시한다.

이쯤에서 기업과 주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친구 5명이 자본금 2억원씩 투자해 회사를 차렸다고 치자. 이후 회사가 멀쩡히 영업하는 와중에 마음이 바뀐 친구 한 명이 자신의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혹은 자신에게 더 많은 배당을 주지 않으면 투자금액을 빼겠다고 막무가내로 협박하면? 이는 기업가치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회사로선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자 모두가 투자금을 회사 내에 유지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주주’가 된다는 것은, ‘투자금을 회수하지 않겠다(투자금 회수 제약, capital lock-in)’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계약이다. 주주가 주식을 매각하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주식 매각에서는 해당 주식을 산 다른 투자자가 주주가 되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투자금 회수가 발생하지 않는다. 스타우트의 표현에 따르면, 율리시스가 인어의 노랫소리에 혹하지 않도록 배의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었듯이 주식회사의 주주들도 ‘자신의 손을 묶는다’. 회사가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제약인 것을 알기에, 주주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타우트는 주주들이 ‘기회주의적(opportunistic)’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도 주목한다. 이를테면 주주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투자금을 묶어두는 것에 동의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런 제약을 풀고 투자금을 회수하고 싶어 한다.

사실 기업의 많은 프로젝트는 주주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협업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기업이 본질적으로 주주만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BP의 사례에서처럼 주주 우선주의는 이런 ‘협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스타우트는 주주들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대해, ‘이사회가 주주뿐 아니라 임직원과 고객, 사회공동체의 요구를 함께 고려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조정 역할을 하는 권력자(mediating hierarchs)’의 의무를 부여받은 이사회는 주주들이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요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위는 한 금융회사의 주주총회장 입구 모습. ⓒ연합뉴스

■ 양심을 키우자

스타우트 교수는 이 문제를 ‘사람의 선함’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종종 성악설에 기반한 법경제학 기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으로 언급되는 〈양심 키우기(Cultivating Conscience)〉에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미디어에는 인간의 악한 면이 자주 보도되지만, 세상엔 착한 사람들과 보이지 않게 선행을 행하는 이들도 많다. 사람에겐 ‘이타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은 성향(unselfish prosocial behavior)’인 ‘양심(conscience)’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선한지 악한지 여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선한 부분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동안 양심은 종교 또는 정치적 포퓰리즘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스타우트는 ‘법과 규제를 통해 양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타우트에 따르면, 이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조건(social cues)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선한 권위의 지시(instruction from authority)’이다. 잘 알려진 ‘복종(obedience) 실험’에서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단순한 권위에 쉽게 복종하면서 죄 없는 사람들에게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나타났다. 이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다른 피험자가 큰 고통을 느끼거나 심지어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지시에 따라 전기고문의 전압을 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복종 본능’이 위의 실험과는 반대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스타우트는 주장한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손해에 개의치 않고 기꺼이 선한 권위에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타인의 선함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 역시 다른 동물처럼 집단의 영향을 받는다. 남들이 착하다고 믿으면 스스로도 착한 행동을 한다. 악행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선함을 믿으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선행을 하게 된다.

세 번째는 ‘나의 선행이 남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본능적인 실용주의자다.

스타우트는 경제학이 ‘탐욕적 인간(Homo Economicus)’을 가정한 탓에 ‘양심의 힘’을 전혀 모델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경제적 ‘인센티브’에 기초한 성과급 제도에서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이 다르게 발휘된다. 물질적 보상을 따르는 것은 선한 권위에의 복종이 아니다. 성과급 보상 체계는 당신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이며, 이기적 행위가 비즈니스에 적절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따라서 남들 또한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성과급은 양심이 설 자리를 빼앗아버린다. 양심이 고려되지 않은 채 경제적 인센티브만 작동하는 경우에 초래되는 폐해의 사례와 연구는 이미 수없이 쌓여 있다. 예컨대 스톡옵션 제도는 경영자들의 위험 추구 성향을 부추겨 필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만든 끝에 기업가치를 오히려 깎아먹을 수 있다. 사람들이 물질적 보상에만 반응하도록 시스템을 짜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스타우트는 ‘글로벌 워밍(global warming·지구온난화)’보다 ‘양심의 쿨링(cooling)’을 걱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양심이 아니라 이기심에 기대면 사회는 정말 그렇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주장들이지만 이를 신뢰할 만한 엄밀한 연구 결과들이 있다. 어떤 연구자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실제로 실험해보았다. 다만 그 실험 이름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월가의 게임’으로 명명했을 때보다 ‘공동체 게임’이란 이름을 붙였을 때 플레이어들이 상호 협력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았다.

스타우트는 경제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가정(‘인간은 이성적이며 이기적인 존재’)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인지심리학, 사회학, 신경과학 등 폭넓은 분야를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행위는 스스로 바라는 바에 따라 ‘가이드(guide)’될 수 있다는 결론은 그래서 여느 처세술 책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싸구려 교훈이 아니다. 스타우트는 친사회적 성향과 이타주의를 옹호했으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 지킬과 하이드라는 인간의 양면성을 진즉에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시민 자본주의’의 더 큰 세상으로

스타우트는 이처럼 인간의 선함을 끌어내는 시스템을 키워 ‘시민 자본주의(Citizen Capitalism)’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불평등 증대, 계층 이동성 감소, 수명 격차 확대, 환경문제 심화 등은 앞으로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문제들은 기업을 이용해서 풀어야 한다. 사람의 양심을 키울 수 있는 것처럼, 기업을 사회공동체에 복무하도록 만들면 가능하다. 기업이 가진 엄청난 힘을 감안할 때 가장 실질적이고 실현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시민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유니버설 펀드(Universal Fund)’가 있다. 민간이 조성하는 펀드로 18세 이상 미국인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한 주씩을 동등하게 배분받아 ‘시민-주주’가 될 수 있다. 자금을 투입해야 주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주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펀드와 다르다. 이 펀드는 개인이나 기업 혹은 부호들의 ‘자율적’ 기부를 통해 조성된다. 펀드는 투자한 기업들로부터 얻는 수익금을 펀드의 시민-주주들에게 배당한다. 시민-주주들은 유니버설 펀드를 통해, 이 펀드가 투자한 회사들에 대한 의결권을 갖는다. 펀드의 시민-주주권은 거래 및 양도할 수 없다. 유산으로 물려줄 수 없다. 보유자가 사망하면 시민-주식은 펀드에 다시 귀속된다. 유니버설 펀드는 투자한 기업의 주식을 장기 보유한다. (펀드의 영향력이 충분히 크다면) 해당 피(被)투자기업들은 단기 성과주의나 주주가치 최대화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장기적 목적을 갖는 시민-주주가 많아지면 이들이 펀드를 통해 시민의 삶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업을 이끄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기업은 평균적 시민들의 이해관계에 더욱 민감하게 된다. 결국 불평등이 줄고, 혁신과 성장이 증가하며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

허황된 꿈이 아니다. 스타우트가 〈양심 키우기〉에서 보여줬듯이 박애주의적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주위에 훨씬 더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선의를 믿는다면 사람들이 선의를 발휘하도록 도울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들의 양심을 선한 방향으로 가이드해야 하는 것이다. 스타우트와 그의 동료들은 유니버설 펀드의 자금을 정부 지원 없이도 40조 달러까지 조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그의 말에 더욱 세심하게 귀 기울여보도록 하자.

스타우트가 떠난 후 그의 동료 법경제학자들은 권위 있는 학술지의 한 호(issue) 전체를 그에 대한 기념 논집으로 발간해 업적을 기렸다. 이제 그의 사상은 ESG의 큰 물결과 함께 되울려 온다. 스타우트의 기일을 맞이하는 심정이 복잡하다. 그는 주주만이 기업의 주인이 아님을 일생을 바쳐 보여주었지만, 한국에선 아직까지 주주조차 기업의 주인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기자명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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