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20년 지기 친구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차미조는 ‘친구의 남자’를 찾아가 오열하며 말한다. “죽일 거야. 너 내가 죽일 거야.” “너 때문이고, 나 때문이야.” 친구 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뒤에도 만남을 이어가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계기가 차미조 본인이기 때문이다. 차미조·정찬영·장주희는 열여덟 살 때부터 친구다. 장주희의 어머니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셋이 돌아가며 밤마다 간병을 했다. 이제 정찬영이 아프다.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서른아홉 살의 세 친구는 ‘신나는 시한부’를 목표로 남은 시간을 채워간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서른, 아홉〉은 마흔을 앞둔 세 여자의 이야기다. 드라마를 연출한 김상호 감독은 “무언가 이뤄냈다고 하기엔 좀 이른 것 같고 새롭게 시작하기엔 늦은 듯한 느낌, 불안정한 시기를 지내고 있던 세 친구가 변곡점을 맞이하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지 담은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누군가 사고를 치면 나머지 두 명이 나서서 해결하고 서로의 사랑을 응원하다가도 신랄하게 비난한다. 결정적인 순간, 부모나 연인에 앞서 친구가 있다. 말기 암이라는 걸 당사자보다 먼저 안 차미조는 친구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그 남자’라 짐작하고 찾아가 그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정찬영을 끔찍이 아낀다.

나이대는 다르지만 또 다른 세 사람이 있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시대에 꿈을 빼앗긴 청춘의 성장기를 그린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다. 나희도와 고유림은 펜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살벌한’ 라이벌 관계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서로가 PC통신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던 아이디 ‘인절미’와 ‘라이더37’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단짝 친구가 된다. 경쟁 관계는 여전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폭력적인 교사에게 반항하다 자퇴를 결심한 전교 1등 지승완도 있다. 구체적인 나이가 제목에 들어 있다는 점 말고도 〈서른, 아홉〉과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글에 따르면 각각 ‘휴먼 로맨스’ ‘청량 로맨스’로, 장르는 로맨스이지만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주인공의 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tvN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tvN 제공

최근 한국 드라마에 ‘여자들’이 두드러진다. 주요 배역의 대부분을 여성이 맡는가 하면 전에 못 보던 여성 캐릭터도 등장하고 있다. ‘여성 우정’이라는 소재도 전보다 진지하게 다뤄진다. 여성 간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이르는 ‘워맨스(woman+romance)’가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지난해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성장세를 견인한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술도녀)〉도 20대 여자 셋의 끈끈한 우정을 그려 큰 사랑을 받았다. 부모의 빈소를 함께 지키고, 제자를 잃은 충격에 방에서 종이접기만 하는 박지구를 끈질기게 기다려주는 건 친구들이다. 원작 웹툰이 있지만 극본을 쓴 위소영 작가는 실제로 “너무 사랑하는 내 친구들 이야기”라고 밝혔다.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tvN에서도 방영되었고 시즌 2 제작이 확정됐다. 흐름은 로맨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이영애 배우가 출연해 화제가 된 JTBC 드라마 〈구경이〉는 연쇄살인마를 쫓는 스릴러다. 주인공도 조력자도 악역도 여자다.

‘원톱’ 여자 주인공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여성 둘 또한 라이벌 구도로 자주 등장했다. 로맨틱코미디에선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경쟁을 벌이는 서사가 흔했다. ‘여성 트로이카(3인) 서사’는 어떻게 다를까?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는 “원톱 여주인공 드라마라고 해도 전체 등장인물은 남녀 반반 정도다. 여성 둘일 경우는 라이벌 구도로 가기 쉽다. 막장 드라마에서 투톱 주연 구도가 지겹게 되풀이되었던 배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셋은 새로운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세 여자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 유형이다. 2019년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나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처럼 2030 여성의 일과 사랑, 일상을 그리는 드라마가 있다. 지난해 인기를 끈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얼마 전 종영한 〈공작도시〉는 여성의 상승 욕구와 처절한 사투, 복수 등을 키워드로 한다. 〈서른, 아홉〉은 전자의 계보를 잇고 홈쇼핑 업계 여성들의 분투를 그린 tvN의 〈킬힐〉은 후자 쪽이다.

JTBC의 〈멜로가 체질〉. JTBC 제공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드라마는 tvN의 〈검블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기업의 임원인 30대 여성들의 직업적 성취와 우정, 사랑을 그린 드라마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쓴 권도은 작가의 작품이다. 대형 포털 ‘유니콘’과 ‘바로’의 30대 여성 임원들은 경쟁하면서도 여론을 조작하려는 정부와 재계의 압력에 함께 저항한다. 김미라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한국극예술연구〉 제65집에 실린 ‘포스트페미니즘 드라마의 서사와 정치적 함의’에서 “〈검블유〉의 여성들은 개인적 정서적 유대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끈끈한 연대를 통해 불의에 맞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보편적 자매애의 위력과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화된 여성주의 서사를 드러낸다”라고 평가했다.

남성 중심 서사와 달리 관계에 집중한다

자매애와 여성 연대라는 키워드가 여성 서사의 중심에 선 것이다. 변정수 평론가는 지금의 흐름이 어떤 징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에 선 건 대단한 변화다. 최근엔 다수의 여성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악당도 다 여자라는 점에서 어떤 징후로 봐야 할 것 같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배경을 빼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2015년 전후의 ‘페미니즘 붐’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2015년은 ‘IS(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칼럼이 나오고 미러링을 표방한 ‘메갈리아’ 사이트가 출현한 해다. 이후 미투 운동과 탈코르셋 등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 페미니즘 담론을 흡수했다. 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역시 “먼 과거에는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남성의 관계로 편입되는 남성 중심의 인간관계가 지배적이었다. 점차 직장 가진 여자들이 늘어나면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우정을 통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현상이 당연해졌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현상을 대중문화가 포착해 상업화하려면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나 서사의 포맷이 바뀐 시기를 생각해보면 페미니즘 담론이 나오던 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드라마의 주 소비층이자 광고주의 타깃인 여성들의 의식이 변화하며 생긴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티빙(TVING)의 〈술꾼 도시 여자들〉. 티빙(TVING) 제공

자매애와 연대를 강조하는 최근의 여성 서사는 그간의 남성 중심 서사와 달리 내밀한 관계에 집중한다. 드라마 속 인물이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변정수 평론가는 “(그동안의 주된 서사였던) 이기고 지는 승부가 아니라 관계에 주목하면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서사를 뽑아낼 수 있는 원천은 결국 관계성에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면밀히 보여주어야 하니까 만화로 치면 말풍선 안에 있던 속내들이 실제 대사로 나오기도 한다. 말의 잔재미를 강조하면서 작법의 변화까지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정보다 대결을 강조하는 구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구경이〉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주인공은 물론 빌런도 여성이다. 두 사람이 대결하면서도 소통하고 있는데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라는 전형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경쟁만이 아니라 서로 존중한다. 새로운 관계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여성 연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앞에서는 경쟁하지만 큰 틀에서는 연대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전통적으로 익숙한 여성 서사는 신데렐라와 커리어우먼 스토리다. 전자가 연애나 결혼 등을 통해 신분상승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간 난항을 겪던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만든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에 출연한 오수경 작가는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 이후 노동하는 여성이 드라마에 유의미하게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남성 가장이 실직을 하면서 여성이 어떻게든지 직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사회가 변하면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드라마에서는 맞벌이나 커리어우먼, 골드미스라는 방식으로 노동하는 여성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 드라마에서 전문직 여성 캐릭터가 늘어난 배경이다. 이제 더는 노동하는 여성이 새롭지 않다. 다른 서사가 필요해졌다.

여성 주인공 중심의 사극, 남성이 대거 등장하는 수사 범죄 등의 장르물, 그 와중에도 공고한 가족드라마 등 여러 흐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최근엔 OTT 플랫폼 중심으로 〈오징어 게임〉 〈지옥〉 등 장르물이 선전해왔지만 한국 드라마의 주력인 로맨스 역시 늘 상위권에 랭크된다. 최근 4~5년 동안 이 드라마들에선 ‘여성의 인간관계’가 강조되었다. 이영미 평론가는 “사랑에 목매는 게 아니라 사적 관계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이 많다. 서사의 목표가 남자와 결혼하거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가족이나 연애가 여성을 구원하거나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시각을 반영한 셈이다. 드라마의 주 수용자가 여성이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라고 말했다. 정덕현 평론가도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던 과거의 멜로 서사를 지나 이제 일은 물론이고 사랑 이외의 요소에도 주목한다. 그런 것들이 진짜 행복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결과다”라고 말했다. 우호적인 여성 관계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기저에 깔려 있다. 2019년 23%대 시청률을 기록한 KBS 〈동백꽃 필 무렵〉에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현재 ‘오피스 로맨스’를 표방하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SBS 〈사내맞선〉도 여성의 우정을 바탕으로 한다.

자매애나 여성 연대는 드라마뿐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이기도 했다. 지난해 가장 주목받은 프로그램 중 하나인 Mnet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는 여성 댄서들의 경연 프로그램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전문 채널답게 경쟁을 통해 여성 댄서의 신경전을 유도한 듯 보였으나 출연진은 ‘여적여가 아니라 여돕여(여자는 여자가 돕는다)’의 서사를 보여주었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나 E채널 〈노는 언니〉 시리즈처럼 운동하는 여성을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도 있었다. 무대 위나 필드에서는 경쟁에 충실하지만 시합이 끝나고 나면 가혹한 생태계를 나란히 걷는 소중한 동료다. 서로 존중하고 응원하는 이들의 모습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었고 일찌감치 여성 코미디언들이 놀 수 있는 ‘판’을 깔았던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 코미디언 걸그룹 ‘셀럽파이브’의 성공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변화를 반기는 시청자가 있었다.

‘술에 취한 여성’이 등장했다

한국만의 분위기는 아니다. 당장 넷플릭스에만 접속해도 여성 셋 주연의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 〈맛있는 로맨스〉가 뜬다.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굿 걸스〉도 보인다. 2020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케일린 셰이퍼는 여성의 우정에 관한 전통적인 시선을 이렇게 요약한다. “여자들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마 레즈비언일 것이다. 서로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얼마나 심술궂고 못됐는지. 남자를 만나면 친구는 내팽개치는 여자들.”

JTBC의 〈서른, 아홉〉. JTBC 제공

작가 스스로도 어린 시절에는 여자의 우정을 하찮게 여겼다. 결혼과 동시에 친구보단 배우자와 가정에 집중하는 삶을 살던 백인 중상층 부모의 영향이었다. 여자들끼리 싸우는 〈앨리 맥빌〉 〈퀸카로 살아남는 법〉 같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은 강화되었다. 조금씩 변화는 있었다. HBO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섹스 앤 더 시티〉는 대도시 전문직 여성 4명의 일과 성, 우정에 대한 드라마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2001년 〈금발이 너무해〉는 핑크색 옷차림을 즐기는 법대생 엘 우즈가 주인공이다. 각본을 쓴 캐런 매컬라는 극 중 주인공이 다른 여성들과의 우정을 유지한 게 의외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성 주연 8명의 〈오션스 8〉의 제작진은 공통적으로 여자 배우의 기 싸움과 내분에 대비하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예측이었다.

2017년 방영된 HBO의 〈빅 리틀 라이즈〉는 어린 자녀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로 인해 충돌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리즈 위더스푼, 니콜 키드먼, 셰일린 우들리 등 유명한 여성 배우들이 출연한다. 소재에서 예상되는 서사를 비켜나 서로를 지켜주고 연대하는 이야기다. 드라마는 2017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여러 부문을 수상했다. 니콜 키드먼은 멋진 역할이 오지 않아 절박한 심정으로 만들어낸 기회라며 우정을 통해 그 기회를 만들었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지난 2월 〈뉴욕타임스〉에 ‘우리가 TV에서 게으르고, 술에 취하고, 파산한 여성을 사랑하는 이유’라는 글이 실렸다. 좀 더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다. “남성 중심의 TV 코미디에서는 게으름뱅이가 흔하다. 유사한 특성이 여성에게는 다르게 작용한다. 시청자들은 이러한 남성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걸스〉의 제작자이자 연기자인 레나 던햄처럼 살해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어떤 여성 캐릭터들은) 순응하고 친화력 있는 여성을 원하는 시청자들을 화나게 하는 것 같다.” 똑똑하거나 예쁘거나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다. 자매애 역시 모든 여성 캐릭터가 갖춰야 할 미덕은 아니다. 그동안 조명하지 않았던 여성의 다양한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사회에도 이제 막 술에 취한 여성(〈술도녀〉)이 등장했다. 여성 서사의 변주 가능성은 무한하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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