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2일 조영숙 명인(갓 쓴 인물)이 여성국극 ‘뺑파전’을 선보이고 있다.ⓒ시사IN 조남진

“볼펜을 서른 자루는 썼지.” 분장실에서 만난 발탈 인간문화재 조영숙 명인(88)은 녹색 두루마기를 벗으며 말했다. 최근 출간된 책 〈여성국극의 뒤안길〉에 대한 소회였다. “내가 컴퓨터로 원고를 쓰겠어요, 누가 대필을 해주겠어요? 빨간 펜, 까만 펜을 한 무더기씩 몇 번을 사와서 쓰고 고치고 했지. 그게 3년이 걸렸네.” 그는 웃으며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손마디가 굽고 휘어 있었다. 펜을 오래 쥐기 힘든 손이었다.

10월22일, 국가무형문화재(제79호) ‘발탈’ 종목 예능 보유자 조영숙 명인의 기념 공연이 열렸다. 발탈꾼이 포장막 안에 앉아 발바닥에 탈을 쓰고 어릿광대와 재담을 나누며 노래하는 민속극을 발탈이라고 한다. 발탈 공연이 끝나고 여성국극 ‘뺑파전(심청전 중 뺑덕이를 주인공으로 만든 창작물)’이 이어졌다. 조 명인은 공연을 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여성국극을 같이 선보인다.

그는 이날 심봉사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끈으로 고정한 수염이나 갓, 태사혜(남성용 전통 신발)가 익숙하게 어울렸다. 하지만 남성용 소품보다는 명인의 걸음걸이나 음성, 여성 역 배우와의 호흡이 그를 더 ‘남자답게’ 만들었다. 작고 왜소한 몸이지만 중저음의 목소리가 무대를 쩌렁쩌렁 채웠다. 조영숙 명인은 70년간 무대에서 남성으로 살아온 1세대 여성국극인이다.

그의 첫 공연 역시 발탈이 아니라 여성국극이었다. 여성국극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만으로 구성된 창극으로, ‘국극’은 당시 창극을 부르던 일반적인 용어다. 주로 야외에서 공연을 했던 1인 소리극 판소리와 달리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이 연기를 곁들여 실내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차별성이 있었다.

여성국극이 가장 영화로웠던 시절은 1950년대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을 다니면서도 공연을 이어갈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조영숙이 당시 여성국극 최고 스타였던 임춘앵의 ‘여성국극동지사’에 입단했을 때도 1951년, 그 시기였다. 이후 임춘앵의 대역배우를 할 만큼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는 익살맞고 말재주 좋은 남성 재담꾼 역으로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월급도 없었어요. 야참비가 조금씩 나왔는데 그걸 다른 연습생들이랑 모아서 비누, 화장품, 속옷 같은 걸 사곤 했어요. 소리 익혀야지, 무술 배워야지. 살림도 다 우리 몫이었거든. 힘도 들었는데 막상 무대에서 관객들이 웃고, 박수치는 걸 보면 또 그 맛에 눌러앉게 되는 거예요.”

최초의 여성국극단인 ‘여성국악동호회’는 1948년 권번(기생조합) 출신 명창 박녹주가 설립했다. 그는 ‘나의 이력서’(1974)라는 글에서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에는 국극사, 조선창극단 등 남자들이 이끄는 예술단체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운영이 남성 위주였고, 여성들은 꽤 푸대접받는 편이었다. 이에 항시 불만을 품고 있다가 내가 주종이 돼서 순전한 여성 단체를 만든 것이다.” 이후 여성국극은 〈햇님과 달님〉(1949)의 성공으로 빠르게 극단이 늘어나며 창극 공연의 존폐를 위협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인기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배우 김경수(왼쪽)와 김진진이 출연한 여성국극 ‘별 하나(1958)’. ⓒ영희야 놀자

“아직까지도 오해와 왜곡이 많아”

기존 혼성 창극이 ‘판소리 다섯 마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여성국극은 ‘민족 오페라’라고 불릴 만큼 무용과 칼싸움,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로 극적인 요소를 강화했다. 설화나 역사에 뿌리를 둔 창작극부터 외국 문학을 각색한 ‘청실홍실(로미오와 줄리엣 번안극)’ ‘흑진주(오셀로 번안극)’ ‘햇님과 달님(투란도트의 번안극)’까지 레퍼토리 역시 다양했다. 배우들이 말을 타고 등장하거나 나무 그루터기에 달린 문이 열리면, 선녀들이 쏟아져 나와 춤을 추는 등 무대연출 역시 실험적이었다.

1984년 〈경향신문〉 이광현 편집위원이 쓴 ‘여성국극의 맥’이라는 칼럼에는 여성국극인 김진진이 당시를 회상한 말이 인용된다. “시공관 같은 데서 공연할 때는 라디오에서 꼭 중계방송을 해주었고 12시부터 공연되는 입장권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 서는 것은 예사였어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더러 혈서를 보내기도 했고… 그때 남자 역을 맡았던 김경수는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여성국극의 번영기는 짧았다. 1960년대 군부독재 시절, 전통문화를 보존·계승하는 문화정책이 펼쳐졌지만 여성들만의 공연은 ‘기이한 통속 예술’로 취급되며 국가의 지원에서 배제됐다. 침체기를 맞은 문화예술 단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여성국극의 전통성을 노골적으로 폄훼했다. “여성 극단의 출현은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뿐이며, 속죄할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박황, 〈창극사 연구〉, 1976).” 이런 관점은 “결혼으로 국극계를 떠나고 서로 자기만의 이득에 집착”하고 “돈만 생기면 옮겨 다니는 소인배적 근성(김병철, 〈한국여성국극사 연구〉, 1997)”이 여성국극을 몰락시켰다며 배우들에게 여성국극의 퇴보 책임을 전가시키는 주장으로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성국극의 재기를 위해 작은 무대도 포기하지 않고 뛰어다닌 여성국극인들의 목소리는 조명받지 못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후대를 양성하지 못한 여성국극은 그렇게 서서히 지워졌다. 조영숙은 〈여성국극의 뒤안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국극,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그의 몰락에 안타까운 마음은 꿈속에서도 못 잊는다. 먼저 가신 분들과 꿈속에서도 여성국극의 무대를 분주히 오간다.”

조영숙 명인은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책을 쓰고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국극이 재기할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여성국극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너무 많아요. 여성국극의 번성과 쇠퇴, 또 재기를 위한 노력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라 절명되어가는 전통 예술의 가치를 복원하고, 단절된 과거를 이어가는 일입니다.”

조영숙 명인은 자신의 제자들을 ‘금덩어리들’이라고 소개했다. “자기들 돈 들여가면서 공연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귀한지 몰라. 근데 우리 힘만으론 무대를 계속 만들 수가 없어요. 국가가 나서줘야 되는 거죠.”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젊은 창극인은 이제 그의 제자 박수빈, 황지영을 포함해 네댓 명이 전부다. 이들은 스승 조 명인의 삶을 그린 여성국극 공연을 11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조영숙 명인은 “여성국극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 창극사의 한 획이 무너지는 것”이라며 여성국극의 가치가 인정돼 공동체종목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공동체 종목 국가무형문화재는 아리랑, 씨름, 김치 담그기, 막걸리 빚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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