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십대여성인권센터는 모바일 앱을 통한 성범죄 피해 청소년을 지원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대학생 때부터 비영리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해왔던 인연으로 최근까지도 종종 비영리단체의 기술 자문을 하곤 한다. 6~7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많이 문의가 들어왔던 건 단체의 홈페이지 개발이나 서버 이전 등이었다. 대체로 단체가 운영하던 홈페이지가 노후화되어 바꾸려 한다거나, 기존 홈페이지의 데이터를 이전하는 등 이슈가 많았다. 전공이 웹 개발인 데다 홈페이지는 워낙 오래전부터 다뤄왔기에 이 정도 문의는 혼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내 역량을 훌쩍 뛰어넘는 범위의 자문 요청이 빈번하게 들어온다. 주로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문의다.

처음 디지털 성범죄 관련해 자문 요청을 받았던 건 3년 전인 2018년이다. 위기 청소년을 지원하는 ‘십대여성인권센터’에서 띄운 메일이었다. 메일은 여러 사람의 메일함을 거쳐 포워딩되다가 나에게까지 도착했다. 여성 청소년 성착취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 개발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단 만나 대화를 나누며 거절할 요량으로 단체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하나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로서는 당시 미팅을 통해 처음 들어본 앱이었는데, 이 앱들은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의 절박함을 기반으로 돈을 버는 데다 그들을 더 큰 폭력으로 내몰았다. 성폭력이 횡행하는 데도 이런 앱은 아무도 감시하지 않았고, 스토어에서마저 최소한의 검수 절차 하나 없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다.

앱만 문제가 아니었다. 불법 성착취 영상을 유통하는 다크웹, 멀쩡한 아르바이트인 척 청소년을 유인해 불법 성착취 아르바이트를 소개하는 불법 웹사이트 등 웹도 문제였다. 그날 내가 만났던 단체뿐만 아니라 여러 여성 단체들이 개발자나 IT 전문가 한 명 없이 수백 개의 앱, 수만 개의 웹과 싸우고 있었다. 이들이 항의하는 내용에 대해 IT 서비스 회사는 ‘정말 몰랐다는 듯’ 태연하게 굴거나 아예 대응하지 않았다.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미팅이 끝난 뒤엔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 미팅 이후 나는 십대여성인권센터와 조금 더 장기적인 연을 맺고 IT 지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현장의 필요를 감당하기엔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공감하는 다른 IT 업계 동료를 모아 팀을 꾸렸다. 매월 정기적으로 모여 피해 사례를 공부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며 작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프로젝트마다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기 취해 있기엔 현실에서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가 너무 끔찍하고 잔혹했다.

비영리단체에서 오는 IT 자문 요청들이 단순한 홈페이지 개발 문의를 넘어서기 시작한 건 ‘N번방’이 터진 즈음이었다. 그때부터는 정신없이 여러 단체에 불려 다니며 회의에 참여했다. 이전의 시민사회단체가 IT를 주로 업무의 도구로 삼았다면, 이제 IT는 그들의 투쟁 현장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여 피해자를 지원하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들의 회의에 자문으로 참여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의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다른 기술 전문가를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이 문제에 빠삭한 전문가를 찾기도 어려웠다. 활동가들이 궁금해하는 IT 개념을 설명하거나 업무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소개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의 전부였다. 나는 일개 웹 개발자일 뿐이니까.

활동가들이 묻는 말들에 ‘그건 기술적으로 어려워요’라고 대답하는 건 무력하고 서러운 일이었다. 돕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이런 질문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대체 왜 사람들은 불법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다운받는가? 웹하드 사이트들은 피해자가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해도 왜 삭제하지 않는가? 심지어 어떤 사이트들은 피해자가 직접 영상 삭제를 요청할 때, 신분증 사진 촬영을 요구한다고도 한다(‘추적단 불꽃’의 뉴스레터 〈불꽃레터〉 중). 그게 자신들의 방침이라면서. 피해자의 신상을 다시 그들이 유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십대여성인권센터 활동가가 성매매 알선 및 청소년 성착취 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너무 쉽고 간단한 약속인데도

기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자부하는 IT 기업은 사방에 널렸다. 억대 연봉을 받는 개발자, IT 콘퍼런스마다 나와서 자신의 기술력을 뽐내는 전문가들도 수없이 많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솔루션들은 당신의 문제를 IT로 해결해주겠다 말한다. 수천만의 데이터를 학습해 스스로 미래의 경향을 예측하는 AI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하는데도, 왜 불법 성폭력 영상을 찾아내고 삭제하는 일은 이다지도 어려운 걸까? 디지털 성착취를 해결하는 데 ‘IT 강국’ 대한민국의 힘은 왜 발휘되지 않는 걸까?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삭제하기 위해 기술을 하나하나 공부하고 있다는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이들이 직접 나서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까.

해결이 요원해 보이지만, 이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도 영상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하지 않으면 된다. 플랫폼은 피해자가 신고한 영상을 즉시 삭제하고, 누구든 성범죄 영상을 다운받거나 보지 않아야 한다. 사실 너무 쉽고 간단한 약속인데도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해마다 영상 삭제 지원에 국가 예산이 사용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툭하면 여성가족부가 예산을 낭비하는 부처라 말한다. 사실 그 세금을 낭비하게 만드는 건 바로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촬영하고 유포하며 그를 끊임없이 다운받아 보는 이들이다.

얼마 전 이른바 ‘N번방’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일행들이 잇따라 형량이 높은 판결을 받았다. 디지털 성착취를 자행해온 조주빈은 징역 42년 형을 선고받았고, 공범인 ‘부따’는 징역 15년, ‘갓갓’은 징역 34년으로 각각 형이 확정됐다. 가해자들이 잇따라 처벌을 받음으로써, 2019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N번방’은 마치 끝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오히려 디지털 성범죄 피해 건수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불법 촬영 피해 건수는 2018년 656건이었는데 2020년에는 2239건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포 협박 피해 건수도 2018년 208건에서 2020년 967건으로 비약적 증가세를 보인다. 이들이 멈추지 않는 탓에 내년에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에는 예산과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 11월은 마침 내년 예산을 심의하기 위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가동되는 때다. 증가하는 피해 사례만큼 그를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규모의 예산과 인력을 바란다. N번방 이후로도 디지털 성범죄는 끝나지 않았다.

기자명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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