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11월26일 여성 모임 ‘eNd’팀이 조주빈 등의 1심 선고를 앞두고 서울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디지털 성범죄자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열었다.

지난 3월 성착취 범죄집단인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었다. 이로부터 8개월이 지난 11월26일, 조씨와 공범 5명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이현우)는 조주빈에 대해 범죄단체 조직,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 등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40년을 선고했다.

조주빈 일당은 당분간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사이 ‘n번방 방지법’이 만들어졌고 법 개정으로 처벌도 강화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이전보다 높아졌다. “텔레그램 성착취를 끝내는 발걸음은 이제 시작”이라고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큼 중요한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피해자는 어떻게 위로받아야 하는가?’ ‘이 사건으로 누가 얼마나 큰 피해를 받았는가?’ 지금까지의 변화는 성범죄자들을 고발한 피해자들의 용기 덕분에 가능했다. 그들은 성범죄의 특성상 다른 종류의 사건 피해자들보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절도나 사기, 살인 등의 범죄에서 피해자들이 오히려 비난받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피해자성’이 곧바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피해자를 질책하거나 조주빈 일당의 동영상을 성착취 범죄 증거가 아닌 ‘음란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정말 ‘안녕’한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피해자의 신체가 드러난 촬영물이 온라인에 업로드되고, 유포되었다가 저장되고, 영상 변형을 거쳐 다시 유포된다.’ 언론에서는 그 피해를 숫자로 기록할 뿐이다. 불법 촬영 수백 회, 업로드 수천 회, 조회수 수만 회….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는 숫자 뒤로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말할 기회가 없을뿐더러 성범죄 특성상 신분 노출에 대한 우려도 크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조치는 영상물 삭제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다. 2016년 온라인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된 이래 영상물 유포 금지와 삭제는 매 순간 급박한 과제였다. 2018년 4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디성센터)가 출범하면서 영상물 삭제 시스템을 갖추어나갔다. 피해자가 촬영물을 제출하면 이를 기반으로 모니터링하며 삭제했다. 디성센터는 올해 상반기에 피해 영상물 4만6000여 건을 삭제하고 피해자 1030명에게 삭제·수사·법률·의료 등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은 ‘삭제 지원만이 절대적 피해 대응책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한다. 우선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100% 삭제란 불가능하다. 영상물을 저장해둔 가해자가 언제 또 유포할지 알 수 없다. 피해자에게 삭제 지원은 최대한 빨리 이뤄져야 하는데, 현실 여건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영상물을 삭제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가해 행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성착취물 사이트에 가입해서 영상물을 조회하고 다운로드해 시청한 뒤 삭제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삭제 지원 업무자가 정신적 타격을 받거나 간혹 영상물 관련 이야기를 외부로 유출하는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삭제 지원이 공적 영역에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설령 불법 영상물이 99.9% 삭제되었다고 해도 피해자의 불안이 끝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물리적인 지원과는 별도의 지원이 필요하다. 바로 주변의 지지다. 지난 5월 서울 교대역에는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광고가 게시되었다. 트위터 ‘교대역 n번방 규탄 지하철 광고’ 계정을 중심으로 뜻을 모은 이들은 6시간 만에 2000만원이 넘는 후원금을 모았다. 당시 계정을 운영한 이는 “시민들에게 n번방 사건을 상기시키고, 피해자가 연대의 메시지를 받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라고 말했다. 성범죄 재판을 방청하고 기록하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법원을 감시할 목적이다.

현실적으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복합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특히 주된 피해자인 10~20대 여성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경우가 많다. 누군가 내 영상을 봤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회생활을 접고, 이 때문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개인정보가 노출되어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집을 떠나야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일상 회복 프로젝트 ‘내가 만드는 하루’

피해자는 누구로부터 경제적 배상을 받아야 할까? 민사소송으로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형사소송 절차와 달리 민사소송에서는 개인정보가 그대로 노출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원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성범죄 피해 여성을 지원해온 원민경 변호사는 “실명을 드러내더라도 가해자에게 보상받겠다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범죄 피해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범죄피해자지원제도를 운영한다. 기금은 범죄 가해자의 벌금과 추징금으로 마련한다. 기금의 6%가 범죄 피해자 보호에 쓰이는데, 긴급생계비는 3개월 동안 50만원씩, 심리치료 지원은 최대 6개월 동안 600만원이 지원된다. 충분하지 않은 데다 이를 받기 위한 기준마저 까다롭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복잡하고, 미성년자는 부모의 승인 없이는 지원금을 신청할 수 없다.

정부의 기금을 신청하지 못하는 이들이 민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6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닷페이스(미디어 스타트업)와 함께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 회복 프로젝트인 ‘내가 만드는 하루’를 진행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뿐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 일상이 ‘달라진’ 이들을 위해 시민들이 모은 후원금을 전했다. 총 4400만원을 최대 75만원씩 피해자 58명에게 배분했다. 지원자를 선별하거나 사용내역 증빙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효린 사무국장은 “얼마나 불행한지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라고 말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피해자의 96%는 ‘일상 회복 지원’이 제도적으로 매우 필요하다고 답했다. 피해자의 24.6%가 ‘지원금으로 경제적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고, 23.8%가 ‘응원하고 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피해자의 회복이란 무엇일까? 이효린 사무국장은 이렇게 정의했다. “영상물 유포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가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하나의 경험으로 소화해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긍정적 자원으로 쓰는 것.”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겪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피해자 지원 활동가들은 절망보다 희망을 말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한 활동가는 “변화가 먼 일처럼 느껴지지만 이미 변화했고 생각보다 많이 변했다. 이건 우리의 성과다. 내가 바꿨다는 성취감을 가져도 좋다. 회복이 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말했다. “그동안 정말 많이 바뀌었다. 나중에 ‘우리 젊을 때 되게 노력했다. 악 쓰고 살았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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