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유서 깊은 영어 사전이다. 1989년판이 마지막 인쇄판이고, 지금은 온라인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사진은 합성 제작한 이미지이다. ⓒ시사IN 신선영

다니카 살라자르 박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 편집자다. 그가 사전의 최근 업데이트 내용에 관해 한국의 기자에게 인터뷰 답변지를 쓰는 동안, 그의 주방 슬로쿠커에서는 galbi(갈비)가 익어가고 있었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어의 음성, 음운, 언어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다. 신 교수는 한국어 기원 단어의 뜻과 용례를 궁금해하는 OED 편집자들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편집자들이 던지는 질문들 가운데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PC bang(피시방)이라는 곳에서는 혹시 음식도 판매하나요?”

조지은 옥스퍼드 대학 동양학부 교수(언어학·한국어학)의 주요 연구 대상은 한국어와 영어 등 다른 언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최근 조 교수의 연구 주제는 학계를 넘어 해외 일반 대중에게도 관심거리가 되었다. 한국어 단어의 여러 의미와 영어 번역에 관한 문의들이 세계 각국 학생·학자·언론으로부터 쏟아지고 있다. 조 교수는 요즘 그들에게 ‘oppa(오빠)’와 같은 한국어 단어들의 숨은 뜻과 뉘앙스를 설명해주느라 바쁘다.

한국어는 이제 한국을 벗어났다. 갈비(galbi), 피시방(PC bang), 오빠(oppa)와 같은 한국어들은 이제 한국 안에서 한국인 사이에서만 사용되지 않는다. 지난 9월 OED에 한국어 기원 표제어 26개가 새로 등재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한다. OED는 세계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은 유서 깊은 영어 사전이다. 11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사용되어 온 85만 개 이상 단어의 의미·발음·변천 과정을 담았다. 이곳에 단어가 한번 올라가면 영영 내려가지 않는다. 그만큼 등재의 조건과 절차가 까다롭다.

해외 한류 팬들이 이끈 ‘한국어의 확장’

이 사전이 처음 편찬된 시기는 1884년이다. 그때부터 지난 8월까지 137년 동안 OED에 올라간 한국어 기원 단어는 총 23개 정도였다. 그러니 OED의 2021년 9월 최신 업데이트 항목에 26개 한국어 기원 표제어가 한꺼번에 추가된 일은 분명 ‘사건’이다.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OED 편집부는 방대한 규모의 언어 말뭉치와 발췌문을 수집해 새로운 영단어의 출현과 변화를 추적한다. 등재 후보 명단이 나오면 편집자들은 인쇄물이나 온라인 공간의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해당 단어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문맥’에 실제 그 단어가 충분히 자주, 오랫동안 사용되었는지 확인한다.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그 단어는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 사람들의 입과 글에 확실히 자주 오르내리는 단어라는 게 입증되는 셈이다. 최종 OED의 네트 위에 남은 단어들 가운데 한국어 기원 단어 26개도 포함되었다.

한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어의 세계화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주도하기보다 한국어 기반의 문화를 소비하는 해외 한류 팬들이 이끌었다. 그들은 한국어 대사의 드라마를 보고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를 듣고 한국인 아이돌 가수의 이름을 부르며 한국어의 확장을 이끌었다. 이번에 OED에 추가된 단어 26개 가운데 대다수가 해외 한류 팬들 사이 인기가 높은 한국 대중문화와 관련된 어휘들이다(〈표 1〉 참조).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oppa(오빠)’ ‘unni(언니)’ ‘noona(누나)’의 OED 수록은 국내외 모두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조지은 교수는 “이런 타 언어의 관계(호칭) 용어가 영어로 등재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영어 입장에서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오빠, 언니, 누나는 왜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을까? OED에 수록된 뜻풀이와 인용문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OED는 ‘oppa’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첫 번째는 ‘여자아이나 성인 여성의 나이 많은 남자 형제. 존경하는 형태의 호칭 혹은 애정 용어, 또한 연상의 남성 친구 혹은 (연인 관계의) 남자친구와 관련된 의미로 확장돼 사용.’ 여기까지는 한국의 사전적 ‘오빠’와 별다를 게 없다.

그런데 OED가 설명하는 ‘oppa’의 두 번째 의미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매력적인 한국 남자, 특히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배우 또는 가수.’ OED는 단어마다 그것이 인용된 문장들을 출판 문헌뿐 아니라 SNS와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찾아서 정리해놓았는데, ‘oppa’의 두 번째 의미 밑에 달린 인용문들은 주로 한류 팬들이 트위터 등 SNS에 남긴 것들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민호, 박서준, 이종석과 지창욱을 궁극의 오빠들(ultimate oppas, ‘오빠’의 영문자 표기 oppa에 복수를 나타내는 ‘s’를 붙였다)이라고 이야기한다(2021년 1월4일, 트위터 @byeonginbestman).” ‘unni’‘noona’도 ‘oppa’와 마찬가지로 연상의 여자 형제뿐 아니라 애정 표현, 혹은 한국 대중문화 속 인기 배우나 가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소개된다.

‘chimaek(치맥)’도 흥미로운 사례다. 한국어에서 치맥의 ‘치(chi)’는 영어의 ‘치킨(chicken)’에서 왔다. ‘맥(maek)’은 한자어 ‘맥주(麥酒)’에서 왔다.  한국의 국어사전에도 아직 등재되지 않은 이 혼종 유래어가 해외의 유서 깊은 영어 사전에 먼저 올랐다. 세계의 영어 사용자들은 ‘(한국과 한국 스타일 식당에서) 맥주와 함께 제공되는 프라이드치킨’을 가리켜 한국인들이 먼저 사용하던 말소리 그대로 ‘치맥’이라 부르기로 약속하고 또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치맥’ 뜻풀이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런 설명이 붙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로 한국 밖에서 대중화되었다.”

skinship(스킨십)’ ‘fighting(파이팅)’이라는 단어도 눈에 띈다. 어떤 한국인들은 의아할 것이다. ‘저 단어들은 원래 영어 아닌가?’ 원래 영어권에선 쓰지 않는 말이었다. 피부를 뜻하는 명사 ‘skin’과 특질과 신분 등을 나타내는 접미사 ‘-ship’을 합친 이 단어는 본래 일본에서 조어돼 한국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OED 최신판에는 ‘skinship’이 한국어 차용 단어로 분류되었다. 조지은 교수는 한국 드라마에 담긴 가족과 연인 사이 잔잔한 신체 접촉 장면들이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어 ‘스킨십’의 고유한 의미를 각인시켰다고 설명했다. ‘싸우다’는 뜻의 동사 ‘fight’에 동작을 나타내는 접미사 ‘-ing’를 붙인 ‘fighting’을 ‘힘내!’라는 격려의 단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한국인들이 처음이었다.

‘일본식 표현’ 혹은 ‘콩글리시’라며 한국인들은 부끄러워하며 쓰기를 지양하자던 이 단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OED 내에 ‘한국어에서 차용한 영어 단어’ 카테고리로 등재되었다. 세계의 영어권 대중들이 이제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의미 그대로 저 영어 단어들을 인식하고 발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번에 들어간 26개 단어가 OED에 등재된 최초의 한국어 유래 영어는 아니다. 1933년 OED 1판 추가본에 한국과 한국어에 관한 최초의 단어 ‘Korean’이 올라갔다. 이후 86년 동안 ‘gisaeng(기생, 1976년)’ ‘taekwondo(태권도, 1982년)’ ‘bibimbap(비빔밥, 2011년)’ 등이 차례차례 등재됐다. 전형과 상징으로서의 한국 문화가 아니라 현재 세계인들 사이 ‘핫하게’ 쓰이는 한국의 일상·대중문화 용어들이 본격 영어 사전에 등재되기 시작한 건 2015년 이후였다. ‘webtoon(웹툰, 2015년)’ ‘K-pop(K-팝, 2016년)’에서 시작해 이제 manhwa(만화), hallyu(한류), daebak(대박), mukbang(먹방), samgyeopsal(삼겹살)도 영어가 되었다.

2018년 2월7일 살라자르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가 옥스퍼드 사전 편집부를 방문한 신지영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일행에게 단어 카드를 보여주고 있다. ⓒ신지영 제공

외국인이 한국어 ‘소리’ 들으면서부터

조지은 교수는 세계 속에서 한국어가 사용되고 확장되는 맥락이 어느 순간에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예전 작가 한강의 소설 등 한국 문학작품들이 해외에서 소개될 때만 해도 모든 단어가 그들 귀에 맞게 영문으로 완전히 번역돼 소개됐다. 한국 소설이지만 텍스트 속에 한국어가 안 보였다.” 바뀌기 시작한 것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직접 ‘듣기’ 시작하면서였다. 영상물이 큰 몫을 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한국어의 사운드(소리)를 듣게 되었다. ‘치맥(chimaek)’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면서 소리를 들었다. 그걸 자신들 귀에 들리는 대로 영문자 표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널리 확산시켰다.”

OED의 살라자르 박사는 필리핀 출신의 필리핀어·영어 사용자이자 K드라마와 한국 배우를 좋아하는 한류 팬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 접한 K드라마는 2004년경 필리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수입해 방영한 〈파리의 연인〉이었다. 당시 한국어 대사 전체가 필리핀어로 더빙되어 방송됐다.

지금 살라자르 박사는 K드라마를 구독형 스트리밍 플랫폼이나 주문형 영상 서비스를 통해 한국어 사운드, 영어 자막으로 시청한다. “한국어를 많이 듣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단어들을 선택하여 내 영어 어휘에 통합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한류 팬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영어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언어에 한국어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오징어’와 ‘달고나’도 영어 사전에 오를까’ 기사 참조)  

여기서 궁금한 것 하나. 세계로 뻗어나간 한국어 유래 단어들의 국적은 무엇일까? 여전히 한국어일까? 영어 사전에 등재되었으니 이제는 영어일까? ‘오빠(oppa)’와 ‘언니(unni)’ 같은 낱말들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조지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어 ‘오빠’와 영어 ‘oppa’는 각자 한국어와 영어의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두 단어의 의미와 용례는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다. 한국어 ‘오빠’와 ‘언니’를 사용할 때는 상대방과의 연령 차이가 중요하지만 영어 ‘oppa’와 ‘unni’는 나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oppa’ 등은 또 미국과 유럽, 동남아 문화권,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 각각에서 조금씩 다르게 사용된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단어들을 ‘상호언어적 단어(translingual word)’라고 부른다. 어떤 단어가 상호언어적 단어로 도약할 때 중재하는 언어가 영어일 뿐이다. 그래서 상호언어적 단어는 국적을 따지기 힘들다. 소유권은 그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에게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OED의 한국어 추가에는 또 하나 의미 있는 지점이 있다. 인용된 한국어 단어들의 용례 다수가 영미권 문헌이 아니라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온·오프라인 텍스트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필리핀·싱가포르 등 영어를 제2의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어 사용자들이 언어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여러 한국어 단어들을 영어의 세계 안에 편입시켰다. 살라자르 박사는 “어휘 혁신이 더 이상 영국과 미국의 전통적인 영어 중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영어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OED의 철학, 혹은 영어 언어권의 인식 변화가 이 현상에 담겨 있다.

9월21일 필리핀 마닐라의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든 선전물에 ‘Oppa’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EPA

이를 통해 한국어에 대한 우리의 철학과 관점도 돌아보게 된다. 신지영 교수는 이번 OED 한국어 추가 등재 건에 관해 다소 ‘웃픈’ 현실을 목격했다. 지난 8월 말 OED 측에서 이것이 한국에서 꽤나 큰 뉴스거리가 될 거라 예상하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한국의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OED 자문에 참여했던 신 교수가 보도자료를 국문으로 번역해주었다. 예상외로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두 개 매체에만 작게 보도가 났다.

그러다 갑자기 관련 뉴스가 쏟아진 시점은, 외신에서 이 소식에 주목해 기사를 낸 이후였다. 한류와 한국어에 관한 세계적 붐을 소개하는 기사가 해외 유력 매체에 실리니 한국에서는 그제야 ‘한국어의 세계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신 교수는 “우리가 먼저 우리말에 주목한 뒤 해외에서 따라와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는 걸 보고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10월9일 한글날이 때마침 겹친 시기였다. 조지은 교수는 한글날 즈음 반복되는, 우리말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꽤나 모순적이라 느꼈다. ‘치맥’과 ‘대박’이 세계를 점령했다며 한국어의 세계화 소식을 뿌듯하게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신조어와 외래어 대신 순수 고유어를 사용하자는 ‘순수 우리말 사랑’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치맥’, ‘대박’처럼 언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산된 단어들은 아직 국립국어원 사전에 못 올라갔다. 신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아직 너무 경직돼 있다. 이런 편견들이 영어권에서는 극복되었다. 우리말도 영어 못지않게 풍부하고 탄탄한 어휘장을 가지려면 순수 우리말에 대한 강박과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영어로 간 한국어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묻는다. ‘어디까지가 한국어인가’ ‘우리말은 무엇인가’, 또한 ‘누가 우리말의 주인인가’.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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