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사우스켄싱턴 지하철역에 붙은 ‘한류’ 기획전시 포스터. ⓒ조지은 제공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 포스터에는 아이돌 팬클럽이 공연장에서 흔드는 야광봉이, 다른 포스터에는 엄지와 검지로 만든 ‘손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두 포스터 모두 정중앙에 한글로 ‘한류!’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HALLYU! The Korean Wave’가 적혀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언어학과 한국어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지은 교수는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열리는 전시 포스터인데 영어보다 한글이 더 윗줄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조 교수가 전시 포스터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 곳은 런던 사우스켄싱턴 지하철역이다. 여기서 도보로 30분 떨어진 곳에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이 있다. 세계 최대 공예박물관이자 빅토리아 여왕 부부의 이름을 딴 ‘가장 영국스러운’ 박물관에서 한류를 주제로 한 전시가 지난 9월24일 시작해 내년 6월25일까지 열린다.

조지은 교수는 20년 넘게 영국에서 살아오면서 이런 ‘쾌재’를 맛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포스터에 영어로 ‘HALLYU’가 크게 찍히고 그다음 줄에 한글로 ‘한류’가 적혔을 거다. 기획을 맡은 로잘리 킴 큐레이터도 순서를 많이 고민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에 ‘한류(hallyu)’가 들어갔다. 타이밍이 딱 맞았다.” OED 편집자들에게 조언을 하는 컨설턴트이기도 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한류의 중심에 한글이 있다.” 혹시 너무 큰 의미 부여는 아닐까. 10월18일, 잠시 한국에 온 조지은 교수를 만났다.

조지은 교수는 소셜미디어와 케이팝 팬덤이 서로 시너지를 내 한류를 확장시켰다고 설명한다. ⓒ김흥구

영국인들이 전시 포스터에 적힌 한글을 읽을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한글을 적는 모험은 안 했을 거다. 사람들의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을 갖는다. ‘이게 한류와 관련된 거긴 한데 무슨 뜻이지?’ 하고.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장벽’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장벽이 문화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관심은 있는데 모르니까 더 궁금한 거다. 런던 시내에는 이미 한글로 된 간판이 많다.

막상 전시를 본 한국인들은 ‘한국 같지 않다’며 불평하기도 하던데.

당연하다. ‘K-wave’의 K는 한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 마치 재외교포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국인은 아닌 것과 비슷하다. 한류는 글로벌한 팬덤이 한국 문화를 가져다가 수용하고, 이해하고, 다시 재해석해낸 문화다. 이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트위터에서 서로 물어보며 알아간다. 작년 한 해 트위터에서 한류를 이야기한 트윗만 약 78억 건이다. 팬덤이 말하는 단어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단어랑 또 다르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도 만들어낸다. 이건 예측도 안 되고 통제도 불가능하다. OED는 여기서 몇몇 단어를 건져 올리는 거다.

팬덤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가 뭘까?

케이팝(K-pop) 팬덤이 기초체력이 됐다. 케이팝 팬덤이 K드라마 팬덤이 되는 식으로 한 층 한 층 탄탄하게 쌓아올려졌다. 확실하게 브랜딩이 됐다. 이들은 충성심이 높고 참여 욕구가 크다. 케이팝과 K드라마가 K커머스까지 연결이 된다. 한마디로 돈이 된다는 뜻이다. 한복, 음식, 뷰티까지. 예를 들어 외국인들이 한국 식당에 가면, 다들 K푸드니까 맛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실제로 그렇게 맛있는 식당이 아닌데도 맛있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뭐든지 신기하고 뭐든지 좋아 보이는 ‘콩깍지’가 쓰인 거다.

왜 하필 K, 한국에 콩깍지가 쓰였을까?

타이밍이 좋았다. 과거에 일본 팬덤도 있었지만 그때는 트위터가 없었다. 구심점이 되는 플랫폼이 없었기 때문에 팬덤이 축적되지 못했다. 반면 지금 한류와 트위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떤 하위문화도 이런 전 세계적인 플랫폼을 날개로 단 적이 없다. 로컬 팬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게 트위터다. 이제 한류는 서브컬처가 아니라 메인컬처, 주류가 됐다. 그동안 아시아 문화는 멋져 보이고 따라 하고 싶고 알고 싶은, 그런 쿨한 지위에 놓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테크놀로지와 소셜미디어가 그걸 가능하게 해줬다. 기술과 트위터와 팬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한류를 확장시켰다.

언제부터 변화를 느꼈나?

2013년에 데보라 스미스가 한강 작가의 책 〈채식주의자〉를 번역할 때 우리 둘이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한국에서도 관심이 없고 외국에서도 관심이 없는데, 아 우리는 언제쯤 주목을 받을까” 이런 한탄이었다(웃음). 그런데 바로 다음 해에 데보라가 맨부커상을 탔다. 이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주영국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엄마·아빠가 K드라마를 좋아하고 언니·오빠들이 케이팝을 좋아하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쿨한 거’를 배우러 오는 거다. 세종학당은 자리가 안 나서 한국어를 못 배울 정도다. 수요가 넘친다.

일종의 ‘덕질’ 같은데.

맞다. 덕질하는 거다. 그런데 덕질을 할 ‘떡밥’이 부족하다. 팬들은 한국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데, 제대로 번역된 자료가 없다. 있다 해도 20~30년 전에 번역된 책 몇 권이 전부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아직 넘지 못한 장벽이다. 한국은 외국 이론을 가져다 쓰는 게 익숙하지 거꾸로 우리 콘텐츠를 가져다 보여주는 건 낯설다. K콘텐츠를 더 알리려면 읽기 쉬운, 가독성 좋은 영어로 번역해서 국제적으로 유통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되도록 한국어 출판보다 영어 출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9월21일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이 언론에 사전 공개한 전시 풍경. ⓒ연합뉴스

지난해 9월 OED에 한국어 단어 26개가 올라갔다(〈시사IN〉 제739호 “‘오빠’와 ‘언니’는 왜 영어 사전에 올랐나” 기사 참조).

한국어 단어가 이렇게 많이 실리는데도 다른 나라에서 질투를 하지 않는다(웃음). 한국어만큼 전 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주목을 끄는 언어가 없으니까. 이제 ‘oppa(오빠)’나 ‘unni(언니)’ ‘noona(누나)’ 같은 단어를 다른 문화권에서도 쓰기 시작할 거다. 원래 영어에서는 상대마다 호칭을 달리하는 ‘관계어’가 없다. ‘you(당신)’ 하나로 내가 아닌 모든 상대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나. 아무리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교포라고 해도 삼촌을 ‘미스터 김’이라고 딱딱하게 부를 수는 없다. 영어로 하면 굉장히 사무적이거나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데 이걸 oppa나 unni라는 단어로 보완할 수 있게 됐다. 영어에 부족한 부분을 다른 언어가 채워가는 선례를 한국어가 보여주고 있다. 한류 덕분에 한국어가 영어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한국어 단어가 몇 개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OED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사전에서 받아들인 단어는 모든 영어권에서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어권에서 받아들이면 모든 나라에서 다 받아들인다. 영향이 글로벌하다. OED는 시대에 발맞추어 빠르게 변화했다. 최초로 디지털 사전을 만들고 트위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국 영어, 특권층의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태도를 빨리 버리고 소비자 중심으로, 모두의 언어를 중심으로 바꿔나갔다. OED 1911년판 서문에서 제임스 머리 편집자가 “영국 사람의 언어가 영어”라고 못 박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영국 사람의 언어가 영어가 아니니까. 영어는 다인종·다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했다. 성장하려면 ‘우리’라는 관념을 바꿔야 한다. ‘당신도 우리가 될 수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 지금 세종대왕의 뜻을 재해석한다면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이거야말로 민초들의 언어 아닌가.

OED에 올라간 ‘chimaek(치맥)’이나 ‘mukbang(먹방)’이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다.

한국에서는 ‘이런 게 무슨 단어냐’ 싶을 수 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자. 지난 한 해 전 세계에서 트위터라는 하나의 플랫폼에서만 80억에 가까운 트윗을 통해 한류가 언급됐다. 거기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치맥과 먹방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단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뭔가? 한글날 항상 나오는 메시지가 ‘순화’인데 순화를 하다 보면 남는 게 없다. 단어는 힘이다. 단어는 많을수록 좋다. 일상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류의 주체는 한국이 아니라 한류를 쓰고 있는 소비자들이다. 그들이 더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융합을 허용하고 북돋아줘야 한다. 그래야 국가 브랜딩이 되고 새로운 시장으로 연결되는데 ‘이건 우리 단어가 아니야, 우리는 저런 문화가 아니야’ 하면서 따지기 시작하면 언젠가 한류와 한국은 분리가 될 거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한국어가 사전에 올라간 일 말고도 한글이 한류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우선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 체계이고, 한국어는 한글 이전부터 내려온 쓰이던 구어다. 이를테면 한글은 하드웨어이고 한국어는 소프트웨어다. 한글이라는 하드웨어에다 다른 나라 소프트웨어를 얹어도 된다. 예를 들어 ‘What’s your name?’을 ‘와츠 유어 네임?’으로 써도 의사소통이 된다는 거다. 한글은 오히려 로마자 알파벳보다 더 완전한 하드웨어다. 없는 발음이 거의 없다. 음성 표현력이 대단해서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 된다. 한국어 체계는 배우기 어려울지 몰라도 한글 자체는 직관적이기 때문에 배우기 쉽다. 한글이 하드웨어로서, 문자 체계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널리 쓰이는 게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미 한글을 배우는 어린이들에게는 한류가 곧 한글이다. 영어를 가져다 쓰는 한류가 아니라 한글을 쓰는 한류를 상상해보라. 한류 4.0, 새로운 지평이 열릴 거다.

다른 언어학자들도 같은 견해인가?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라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다. 굉장히 많은 언어학자들이 한글에 대해 놀라워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K한류의 K가 더 이상 한국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처럼, 앞으로 한글도 한국의 문자 체계만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시점에서 순화를 이야기하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문법이라는 개념은 사라질 거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아무도 문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껏 언어사에서 본 적 없는 현상이다. 한류를 떠나서 언어학자로서 너무나 즐겁다.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다. 대학에서 월급을 받고 연구를 하는 나도 힘에 부치는데, 트위터에서 한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가 없이 날마다 글을 올리면서 지치지 않는다. 이 에너지와 결합해야 한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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