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를 데려온 것이 벌써 9년 전이지만 아직도 고양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김영글 제공

고양이에 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거짓말과 닿아 있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고양이에 관해 아는 것이 전무했던 우리 가족은 사람에게 눈길도 손도 좀체 주지 않는 차가운 성격의 동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 고양이와 제대로 관계 맺은 것은 다름 아닌 글 속에서였다. 어느 가을날 백일장에서 쓸 만한 글감이 똑 떨어졌는데 마침 고양이가 떠올랐다. 슬프게도 같이 사는 고양이가 죽었다고,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 썼다. 그런데 이튿날, 거짓말의 일부가 현실이 되었다. 고양이가 정말로 죽어버린 것이다. 엄마는 고양이가 쥐약을 먹은 쥐를 먹었다고 했다. 혹시 내 글이 고양이를 죽인 걸까? 책에서만 읽었던, 말이 씨가 된다는 무서운 문장이 커다란 바위가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이후로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어린 나로서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진짜 현실과 글로 만들어진 가짜 현실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상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를 선택적으로 점검하는 일이며,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일이라는 복잡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는 더욱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성인이 된 후 다시금 고양이가 내 삶에 들어왔다. 요다, 모래, 녹두,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길고양이 세 마리(사진)는 우여곡절 끝에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종과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현실에서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첫째 요다를 집에 데려온 것이 벌써 9년 전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고양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확실하게 배운 것 하나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이상하고 집요한 족속이 아닌가.

나는 부업으로 출판사를 차린 뒤 동료 작가들을 초대해 고양이와 함께하는 미술가의 삶에 관한 에세이집 〈나는 있어 고양이〉(2020, 돛과닻)를 펴냈다. 그 책에서 나는 선언적으로 썼다. “나와 고양이는 완벽한 타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한다.” 큰소리치듯 썼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말도 통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적지 않은 노력을 들인다. 열심히 말을 걸어보고, 기분을 추측하고, 왜 화가 났는지 몰라 쩔쩔매고,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언어를 고안해보고, 눈빛 하나 몸짓 하나에 반응하면서, 서로를 길들여간다.

털북숭이들 덕분에 알게 된 것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동물병원만 가면 의사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요다가 이런 표정을 짓는데 왜일까요? 녹두가 이러는 건 어째서죠? 그러던 어느 날 의사가 차분하게 내뱉은 촌철살인은 지금도 잊기 어렵다. “고양이의 행동을 다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집사 9년 차, 이제 나도 나름대로 지침이 정리되었다. 사랑하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 그러나 다 이해하려고 하지는 말 것.

나는 내 삶에서 관계 맺게 된 이 털북숭이들 덕분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쏟는 노력과 관심이 타인에게로, 사회로, 조금씩 더 낯설고 넓은 영역으로 가지를 뻗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느리지만 의미 있는 확장 속에 ‘반려’라는 말의 참뜻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살이가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기자명 김영글(미술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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