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한국 사회만 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선진국의 시선’에 민감하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고, 한국 관련 순위에 촉각을 세운다. 하지만 정작 해당 제도가 도입된 맥락과 운영 과정, 주체들의 조건과 상태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법조문’만 빌려오기 일쑤다. 노동 분야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는 사용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활용한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을수록,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척도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 한국이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이 되었다고 한다. 노동기본권 수준은 최하위 등급인 5등급으로 분류되고,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 수는 2020년 기준 하루 2.4명꼴로 OECD 국가 중 상위권을 차지하며,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이 미흡하고 실행도 더뎌 ‘기후악당’이라 불리는 나라가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성장 담론’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다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우리의 시선’을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담아내야 할 책임이 더욱 크게 부여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중심에 ‘사회정의’ ‘민주주의’라는 키워드가 있다.

로마법전 〈학설휘찬〉에서는 ‘정의’를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의연하고 항구적인 의지”라고 했다. 이때 ‘각자의 몫’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문제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분배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그 틀을 결정하는 원천적인 권력의 분배 문제를 의미한다(노동법학자 박제성). 이때 권력의 분배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 곧 민주주의를 말한다. 이렇게 ‘정의’와 ‘민주주의’를 이해하면 노동자들이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일터의 일상적인 일을 결정하거나 이사회에 참석해 전략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된다.

한국 노사관계에서 ‘각자의 몫’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임금 지급 문제로 축소되어왔다.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으로 바뀐 지 오래다. 참여를 통한 권력의 분배, 이를 통한 인간적인 노동체제 형성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물질적 분배만큼 중요한 의제가 되지는 못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그룹 회장 아들인 오태영 상무(백현진 분)는 직원에게 골프채를 휘두르며 말한다. “여기는 내 회사잖아.”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거(페놀 유출 사건) 다 우리 얘기다”라며 사건 해결에 직접 나선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이유가 이자영(고아성 분)의 말처럼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를 넘어서는 것”이고, 스스로를 의사결정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면

인류가 당면한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도 정의와 민주주의는 중요한 과제다. 줄리 바틸라나 하버드 대학 교수 등이 주도해서 발표한 ‘노동:민주화, 탈상품화, 생태복원’ 성명서가 지적하듯, 자본의 수익이 중심이 된 위기 극복 프로그램은 우리가 이 지구에서의 삶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할 것이다.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기업을 구하고자 한다면, 기업에 엄격한 환경기준을 준수하고 기업 내부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며 운영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정부 발표대로 ‘한국판 뉴딜’이 한국의 경제와 사회를 새롭게(New) 변화시키겠다는 약속(Deal)이라면, 그 새로운 약속에는 사회정의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고 노회찬 의원의 말을 빌리면 “그 꿈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 이번 호로 ‘지금 여기의 노동’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필자와 삽화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