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9일 한 트레이더가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고 있다. ⓒREUTERS

미국의 주가지수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 Index)’의 기록은 1896년부터 시작된다. 현대적 개념에서의 미국 주식시장은 12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인데, 최근 투자자들은 미국 증시 역사상 가장 뜨거운 강세장을 목격하고 있다. 미국 주식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2월에 바닥을 친 이후 지속적인 상승세를 이어왔다. 올해 9월 초까지 주요 지수들이 연이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151개월째 강세장이 나타나고 있다. 2018년 경기둔화 국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큰 폭의 조정세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주가하락 기간이 2018년은 3개월, 2020년에는 불과 1개월에 그쳤기 때문에 주식 보유자들이 낭패를 보는 약세장이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전의 최장 기간 상승 기록은 IT 혁명과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세계화의 진전이 맞물리며 ‘자본생산성’이 극적으로 개선됐던 1990년대의 113개월이었다.

물론 미국 주식시장만 활황인 것은 아니다. 장기간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증시도 지난해 이후 힘을 내고 있다. 주택가격 상승세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 5~6월에 급락세로 비틀거렸던 가상화폐도 9월 초 현재 빠른 반등세를 나타내고 있다. 속성이 다른 많은 자산이 동반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강화됐던 저금리의 힘이 자산시장을 밀어올리고 있다.

다만 금리가 높아지면 미국 주식시장의 상승세도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올가을은 중앙은행의 시간이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극단적으로 낮췄던 금리 정상화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이미 8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도 ‘테이퍼링(tapering, 아래에서 설명)’의 시행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헬리콥터 벤’으로 불렸던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 ⓒEPA

테이퍼링은 긴축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중앙은행은 경제에 공급되는 유동성을 늘리거나 줄일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 존재 자체가 권력이다. 유동성 조절의 통상적 수단은 기준금리다. 경기가 안 좋으면 기준금리를 내려서 유동성을 공급하고, 경기가 과열이면 기준금리를 높여서 유동성을 흡수한다.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흡수하는 행위를 ‘긴축’이라고 부른다. 테이퍼링은 긴축정책이 아니다. 유동성을 줄이는 정책이 아니라 경제에 공급하는 신규 유동성의 양을 줄이는 정책이다. 유동성의 공급 자체가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다. 다만 ‘플러스 규모(유동성이 늘어나는 정도)’의 축소를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를 끝내는 과정이 테이퍼링이다. 테이퍼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양적완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과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통해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바 있으리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있었던 벤 버냉키는 ‘헬리콥터 벤’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중앙은행은 헬리콥터에서 지폐를 뿌리듯이 유동성을 아낌없이 경제에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런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럼 실제로 중앙은행은 어떻게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까? 헬리콥터에서, 혹은 중앙은행 옥상에서 현금을 뿌릴 리는 만무하다.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한다.

어떤 식으로? 우선 민간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자행의 계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시민들이 민간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려면 일단 민간은행 보유의 특정 자산(국채 등의 증권)을 사들인다. 그리고 자산의 매입 대금을, 중앙은행에 개설되어 있는 해당 민간은행의 계좌에 꽂아준다. 민간은행은 이렇게 들어온 돈을 기반으로 대출을 늘릴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전체 경제에 공급되는 유동성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특정 자산을 민간은행에 매도하면 민간은행의 계좌에서 중앙은행으로 돈이 빠져나간다. 중앙은행이 민간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미국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장기채권(상환 만기가 긴 채권)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한 정책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연방준비제도는 매월 8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 400억 달러 규모의 모기지 담보부채권(MBS) 등 모두 1200억 달러의 유동성을 경제에 신규 공급해왔다. 이 같은 양적완화의 규모를 점차 줄여나가는 과정이 테이퍼링이다. 매월 1200억 달러씩 풀리던 유동성이, 1000억 달러나 500억 달러 등으로 줄어들면서 종국에는 ‘신규’ 유동성 공급을 끊는 게 테이퍼링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유동성의 신규 공급 규모를 줄이는 것이지, 경제에서 유통되는 유동성을 흡수하는 정책이 아니다. 연방준비제도 의장 파월이 누차 주장했듯 테이퍼링과 긴축은 다른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시장은 테이퍼링에 대해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자산가격은 그 자산이 가진 내재가치(fundamentals)와 그 자산 구입에 사용될 수 있는 유동성(liquidity)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미국 프로야구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뛰는 류현진 선수의 연봉은 한국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에서 뛸 때보다 50배 이상 늘어났다. 투구의 속도, 커브의 낙차, 체인지업의 완급 조절 능력 등은 류현진이라는 야구선수의 ‘내재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류 선수의 ‘연봉(일종의 가격)’이 그가 던지는 공의 스피드가 미국에서 파격적으로 빨라진 덕분에 50배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류현진이라는 선수를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크기 때문에 연봉도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 자산시장에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중앙은행이 매월 1200억 달러씩 공급해줬던 유동성의 규모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자산시장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7월15일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 ⓒREUTERS

자본 없는 자본주의

또한 테이퍼링은 다음 단계인 긴축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파월은 테이퍼링과 긴축은 다르다는 당연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일단 테이퍼링 계획이 발표되면 투자자들은 긴축이라는 다음 단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테이퍼링 계획을 올해 내로 발표하고, 늦어도 내년 초부터는 테이퍼링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설사 미국 경기회복세가 둔화되더라도,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국면 같은 비상상황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관점에서도 테이퍼링은 조기에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통화정책이 긴축 지향적으로 바뀌는 국면에서는 미국 주식시장보다 미국 밖의 시장, 특히 신흥국 시장이 홍역을 치르곤 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테이퍼링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경제가 코로나19 팬데믹의 충격으로부터는 확실히 벗어났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경제 상황은 미국만큼 순조롭지 않다. 특히 신흥국들은 백신접종 속도, 경기회복을 위해 사용된 재정지출의 강도 등에서 미국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 나라들이 미국 테이퍼링의 충격을 더 강하게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금융 세계화의 진전으로 글로벌 투자자금의 연결이 강화돼왔다. 한국 증시만 보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34%에 달한다. 한국은행의 금리인상은 글로벌 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국지적인 변화인 반면,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는 파급효과가 크다.

글로벌 주요국 증시 가운데 미국 증시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나타내는 흐름은 앞으로도 더 이어질 것 같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혁신이 미국 기업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신산업의 생태계는 미국 기업들에 의해 장악됐다. FAANG(페이스북·애플·아마존·넷플릭스·구글)으로 대표되는 미국 기업들의 약진은 놀랍다. 이들은 과거 국가의 의제였던 프로젝트(우주 탐사, 발간된 모든 책의 데이터베이스화 등)를 수행하면서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성장주들이 주로 거래되는 세계 주요 증시들 중 미국 나스닥 시장이 나타내는 독보적 성과는 미국 기술주들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에도 벤처기업들이 주로 거래되는 코스닥 시장이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분야의 원조인 나스닥을 본떠 만들어진 시장이다. IT 기술 진보에 기댄 생산성 혁명으로 미국의 닷컴기업들이 각광을 받았던 1990년대 중반에 나스닥을 벤치마크해서 많은 성장주 시장이 세계 곳곳에 만들어졌다. 코스닥은 1996년에 개장했고, 영국의 AIM(Alternative Investment Market), 캐나다 TSX 벤처, 타이완의 그레타이(GRETAI) 증시 등이 비슷한 시기에 열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세계 성장주 시장은 나스닥과 비슷한 행보를 나타냈지만, 이후에는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성장주 시장들이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나스닥만 예외적으로 독주한다. 물론 나스닥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성장주 주가가 과거에 많이 올랐다고 해서, 앞으로도 더 오른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위대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주가가 그 ‘위대함’을 이미 충분히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오른쪽 그림 ‘세계 성장주 시장 주가지수 추이’ 참조).

필자는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숭배한다. 욕망하지 않는 자본은 자본이 아니다. 자본의 욕망은 자기 증식에 있다. 자본의 인격적 표현인 자본가들이 주로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주요 기업들은 이런 상식적 직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들은 자본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을 파괴한다. 전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기업인 애플의 자기자본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보잉 등 우량기업은 자기자본이 아예 마이너스인 상태다. 회계적으로는 자본잠식 상태에 있는 것이다.

통상 자기자본이 줄어드는 기업은 적자가 쌓이는 부실기업인 경우가 많다. 손실을 내면서 과거에 벌어놓은 이익을 까먹는 경우 자기자본이 줄어든다. 애플 같은 초우량 기업이 여기 해당될 리는 없다. 애플은 벌어들인 이익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주주환원이라는 이름으로 주주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애플은 자사주 매입 2096억 달러, 현금배당 419억 달러 등 총 2515억 달러를 주주환원에 사용했다. 같은 기간의 당기순이익 1721억 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돈을 주주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반면 설비투자 금액은 311억 달러에 불과했다.

애플의 자기자본 감소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무한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의 팽창이 한계생산을 체감시킨다고 봤다. 마르크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자본집적에 따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공황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1000만원을 투자해 100만원을 벌기는 쉽지만 100억원을 투자해 10억원을 벌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자본 스톡이 많이 쌓여 있는 선진국의 성장률이 신흥국보다 낮은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 유수의 기업들은 오히려 자기자본을 줄이고 있으니 한계생산의 체감이나, 이윤율의 저하라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투자자들은 이들 ‘위대한 기업’에도 리스크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듯하다. 비즈니스 모델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기보다 그동안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관련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식이건, 부동산이건 기본적으로 투자는 여윳돈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동안의 문제는 실물경제의 정체 속에 나타나는 자산가격의 상승이 불평등을 강화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의 주요 기업들은 기업의 성과가 거의 모두 주주환원이라는 형태로 주주들에게 귀속된다. 대주주의 전횡으로 소액투자자가 제대로 된 주주 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많은 한국 투자자 처지에서는 부러운 일이지만, 당기순이익보다 더 큰 규모의 주주환원을 하는 기업이 드물지 않은 미국식 자본주의는 지나치게 ‘주주 본위’적이다.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이 독주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독점 규제,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이 미국 주식투자에 내재된 장기적 리스크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