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시에 위치한 해군 제2함대사령부의 정문. ⓒ연합뉴스

해군 중사 ㄱ씨(여·32)는 5월24일 인천광역시에 있는 한 섬 지역의 부대로 전입했다. 복무 11년 차인 ㄱ 중사는 ‘험지’로 여겨지는 섬 부대에 두 번이나 자원할 만큼 경험 많고 의욕적인 군인이었다. 전입 사흘 뒤인 5월27일, 부대 밖 식당에서 같은 부대 소속 ㄴ 상사가 ㄱ 중사를 성추행했다. 해군 측은, ㄱ 중사가 사건 당일 주임상사에게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리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사건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공군 성추행 사망 사건’이 한창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 중사는 성추행 피해 신고 뒤 2차 가해에 방치되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8월12일, 해군 중사 ㄱ씨도 공군 이 중사와 같은 선택을 했다. ㄱ 중사가 피해 사실을 알린 후에도 해당 부대는 가해자·피해자 분리나 상담 지원 등 제대로 된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보고받은 주임상사는 가해자에게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

유족들은 그 사이 ㄱ 중사가 2차 가해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실은 ㄱ 중사가 8월3일 부모에게 보낸 메시지를 공개했다. 그는 메시지에서 사건 후 업무에서 배제돼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 지난번에 미친× 있었잖아요. 일해야 하는데 (나를) 자꾸 배제하고 그래서 오늘 부대에 (정식) 신고하려고 전화했어요. 제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안 될 것 같아요.” 하 의원실은 이어 “가해자가 화해하자며 피해자를 부른 뒤 술을 따르라고 시키고 ‘술을 따라주지 않으면 3년 동안 재수가 없다’는 폭언을 했다. 진급이 어려워지거나 고과 점수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피해자를 압박했다”라고 말했다.

해군에 따르면 8월7일 피해자는 소속 부대장 등과 두 차례 면담 후 8월9일 피해 사실을 정식 신고했다. 같은 날 해군은 ㄱ 중사를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로 파견 조치했다. 8월10일 해군 군사경찰이 수사를 개시한 지 이틀 후인 8월12일 ㄱ 중사가 해군 제2함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군은 공군 이 중사 사망 이후 ‘성폭력 피해 특별 신고 기간(6월3일~6월30일)’을 마련하는 등 피해자를 적극 구제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군대 내에서 피해자가 안전하게 성추행 피해를 ‘공론화’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5월27일 피해자의 최초 신고 때 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해군은 “안타깝지만 법령과 훈령이 상충하는 면이 있다. 법령은 사고가 일어나면 바로 보고하게 되어 있지만 훈령은 피해자 의사에 반하면 보고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라며 피해자가 피해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군 측이 이야기한 법령을 살펴보자.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기본법) 제43조 1항은 “다른 군인이 성추행 및 성폭력 행위를 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즉시 상관에게 보고하거나 군 수사기관 등에 신고해야 한다”라고 명시한다. 국방부 ‘부대관리훈령(훈령)’ 제245조 5항에도 “신고를 받으면 1·2단계 상급 부대와 각 군 본부 양성평등센터에 보고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훈령이 개정되면서 같은 항에 새로운 문장이 추가됐다. “다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업무를 해서는 안 된다.” 해군은 이 조항을 근거로 ㄱ 중사가 원하지 않으니 사건 보고 등 이후 조치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성추행 피해자인 해군 중사 ㄱ씨의 빈소가 마련된 국군대전병원 앞에 ‘전군 성폭력 예방 특별 강조 기간’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시사IN 이은기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했다는 해군의 결정이 피해자 중심의 지원이었을까? 군 내 성추행 사건 해결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건 피해자가 피해 신고 이후에도 계속 부대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군인으로서의 업무와 동료들과의 관계도 계속된다. 2017년 해병대 대위로 퇴역한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은 “군이라는 폐쇄적인 조직, 섬이라는 고립된 근무지에서 피해자가 신고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를 살펴야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유언비어가 돌거나 업무에서 배제되는 등 어려움이 발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신고하지 않겠다는 게 ‘아무 도움이 필요 없어요’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건 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부대 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피해 사실 보고 의무화해야

법령과 훈령이 상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해군의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법령과 훈령이 충돌할 때는 상위법(법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또한 훈령에서 왜 ‘피해자 의사 고려’를 명시하게 됐는지 그 맥락까지 봐야 한다. 2015년 제정된 기본법에 피해 신고 의무가 포함된 건 2014년 군 내 가혹행위로 사망한 ‘윤 일병 사건’ 때문이다. 조직이 폭력 사건을 은폐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신고를 법령으로 의무화한 것이다. 훈령에 피해자 의사에 반해 사건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추가된 건 2차 피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두되어서다. 피해자의 심리상태에 대한 이해나 공감대 형성 없이 신고를 통한 정식 절차를 기계적으로 종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아무 조치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은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경우에도 피해 사실 보고 의무가 필요하다고 본다. “신고는 형사절차 개시를 의미하는데, 보고는 개인 신변의 변화 등을 상급자한테 알리는 행위다. 피해자가 보호받으려면 어느 정도 수준의 보고가 의무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건이 피해자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조직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다.”

피해자는 8월9일 정식 신고 접수 뒤 사망한 12일에 이르기까지 성고충 상담관과 8차례 통화할 만큼 괴로워했고 해결 방안을 찾고 싶어 했다. 그랬던 그가 왜 사망했는지 2차 가해에 대한 수사가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8월14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 군사법원은 강제추행 혐의로 가해자 ㄴ 상사를 구속했다. 8월17일엔 해군 군사경찰이 피해자와 면담했던 소속 부대장, 피해자에게 최초 보고를 받았던 주임상사를 신고자 비밀보장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부대장은 ㄱ 중사가 전출 간 당일 ‘성폭력 사건 2차 가해 예방 교육’을 진행해서 사실상 ㄱ 중사의 피해 사실을 노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철저히 수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족의 바람대로 ㄱ 중사가 마지막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 공군 이 중사, 해군 ㄱ 중사 등 앞선 피해자가 피해 신고 후 고립되고 끝없는 2차 피해를 겪은 걸 목격한 또 다른 피해자들은 무력감을 학습한다.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고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해군 ㄱ 중사 사망 5일 후인 8월17일 열린 ‘군 긴급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못한 피해자를 긴급히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유랑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2차 피해로부터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면 피해자는 당연히 조치를 취하고 싶어 한다. 군이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니라) 피해자가 신고하길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걸 보며 다른 피해자가 더 숨어야겠다고 판단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 도움이 필요한 군 성폭력 피해자는 아래 기관에 상담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군인권센터 아미콜 02-7337-119,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기자명 대전·이은기 수습기자 다른기사 보기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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