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호화 아파트에서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다.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들이 아파트 입주자 명단에 올라 있는 고이토 가족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진짜 고이토 가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웃들의 증언은 서로 엇갈리고, 등장인물이 한 명씩 늘어간다. “물론 이 사람들 전부가 ‘사건’에서 등거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략) 또 한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 즉 사건에서 가장 먼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뒤 ‘그 일은 이렇게 일어났다’고 담담하게 세상의 원리를 설명해주는 신처럼.
소설가 시게마쓰 기요시는 이렇게 질투한다. “안정된 어조를 보여주는 화자를 ‘신의 시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렇게 자상하고 따뜻한 눈길을 이야기 구석구석까지 보내는 신이 있기나 하냐고 투정을 부리고 싶을 정도다.”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정서는 뜻밖에도 다정함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비록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들을 무안하게 하거나, 홀로 남겨지도록 내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치에코의 기억이 참으로 구체적이어서 경관들도 놀랐지만, 아쓰코도 놀랐다. ‘하마터면, 어머니도 참 한가하시나 보네, 하고 말할 뻔했다니까요’ 하고 웃으면서 말한다. ‘하지만 웃으면 안 되겠죠. 어머니의 세계가 그만큼 좁다는 거니까요. 어머니가 그 좁은 세계에서 잘 참아주시는 덕분에 내가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정중하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추리소설이라니. 678쪽이 술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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