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첫사랑〉은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마음을 다루고 있다.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책 토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 주인공이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어린이책 〈첫사랑〉을 읽고 함께 토론하면 좋겠다고 학교에 제안했다. 낯선 도시로 이사를 와 처음 다니게 된 유치원에서 주인공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 행복을 느끼지만 결국 그 친구와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마음’에 관해 학생들과 토론하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 토론 날짜가 가까워진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을 받았다. 사전에 책을 검토해봤는데 동성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책으로 바꿔서 책 토론을 진행해달라고 했다. 〈첫사랑〉이라는 책이 담고 있는 ‘동성애’라는 주제가 교육적으로 무리가 있고, 학부모로부터 나오는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책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인 동성애를 이유로 반대한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와 그 순간의 마음이 군더더기 없이 표현된 책을 읽으며 ‘사랑하는 마음’의 아름다움을 느낀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어떤 사랑은 되고 어떤 사랑은 안 되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작가의 세계관이 담긴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서로 생각을 나누고 자신의 철학을 쌓아가는 책 토론을 통한 배움은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왜 유독 동성애라는 단어 앞에서 멈춰야 할까? 사람의 성적 지향을 가지고 차별하는 말을 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왜 유독 동성애에 관한 (벌어지지도 않은) 학부모의 민원에 학교가 지레 겁을 먹는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고 학교가 안 된다고 했으니 안 되는 것이었다.

기준도 이유도 납득할 수 없이 가로막힌 답답함과 함께 슬픈 마음이 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 역시 어른들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때 주인공이 느꼈을 슬픈 마음을 같이 경험하는 것 같았다. 내 성소수자 친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친구가 부딪혀왔을 세상을 조금이나마 경험한 것 같아 슬펐다.

결국 책을 바꿔서 학생들과 책 토론을 진행했다. 마지막 소감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애초에 토론할 책으로 제안했던 〈첫사랑〉 책을 같이 토론하지 못하게 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했다. 학교 구성원으로서 이 과정과 학교의 결정에 대해 학생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 그 공간에 성소수자 학생이 있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 상황에 대해 듣게 된 것이 오히려 그이(들)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닐지, 당시 내가 했던 말이 혹시 있었을지 모를 당사자를 충분히 고려한 말과 단어 선택이었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부모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고, 어떤 조건과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가는 내가 선택할 수도 없으며 또 내 노력에 따라 결정될 여지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내 삶을 결정하거나 내 선택을 가로막는 일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될 수 있다. 차별을 구조화하지 않는 사회, 편견이나 관습 같은 사회문화적 요소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차별에 대해서도 그것은 차별이고 누구든 차별하면 안 된다고 명확한 기준을 말해주는 법! 지난해 6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에는 교육기관에서 교육 내용의 차별 금지에 관해 명시하고 있다. 책 토론이 열렸던 3년 전 그때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있었다면 학교가 그토록 우려했던 학부모 민원에 대해 법안을 근거로 제시하며 〈첫사랑〉 책으로 토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차별금지법에서 금지한 명백한 차별행위임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2018년 6월8일 지방선거 사전투표 당시 춘천교육대학교 투표소를 찾은 휠체어 탄 유권자. ⓒ연합뉴스

법과 법 사이에 존재하는 휠체어 탄 친구

법이 있다고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난 4월7일 보궐선거 당시 휠체어를 타는 친구가 사전 투표소에서 겪은 장애인 차별에 관한 경험을 토로했다. 매번 개인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친구가 방문한 사전 투표소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주민센터 건물 3층에 위치해 있어서 장애 접근성이 없었다. 그래서 건물 밖 1층에 천막을 치고 투표소를 따로 만들어 휠체어 장애인이나 계단을 오르기 힘든 유권자들을 분리해 투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신분증 확인도, 기표를 마친 투표용지도 생전 처음 보는 투표 사무원들에게 맡겨야 했다고 했다.

분리투표에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은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건물 밖 1층에 따로 마련된 투표소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으로는 분명한 차별이지만, 선거관리법상으로는 예외 조항에 해당해서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장애인으로서는 차별받으면 안 되지만 장애인 유권자로서는 예외 조항에 해당되어 차별이 아닐 수 있다는, 법과 법 사이에 존재하는 휠체어를 탄 친구는 선거 때마다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

고백하건대 살면서 나는 차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위를 했거나 침묵하고 방조해왔을 것이다. 지금도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다. 지역감정을 정치의 도구로 활용했던 당시의 정치 문화 때문이었는지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시장에서 장사를 해오던 부모님은 손님을 출신 지역에 따라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다. 자주 듣던 그 말을 기계적으로 내면화한 채 살던 나는 어느 하굣길 단짝 친구에게 부모님이 자주 이야기하던 특정 지역 사람에 관한 차별 발언을 했다. 친구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물었고, 자신의 부모가 내가 차별 발언을 한 그 지역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의 이유 없는 차별과 비하 발언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지도, 사과도 하지 못한 채 어물쩍 넘어갔던 것 같다.

그 사건은 차별이 어떤 식으로든 단단히 자리 잡은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예민하게 살피며 살지 않으면 언제든지 누군가를 차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내 말이 단짝 친구를 얼마나 슬프게 만들었을지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럽고 미안하다. 차별금지법이 일상의 문화가 된 사회에서는 그날 친구와의 하굣길 대화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혹은 뱉어버린 차별의 언어를 수정하고 즉시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두의 행복한 일상을 위해, 이번에는 반드시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제정되길 바란다.

기자명 이진영 ((사)양천마을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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