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 각하 판결 후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항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6월14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85명은 일본 전범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사건(‘2차 강제동원 손배사건’)에서 항소를 제기했다. 이는 앞선 6월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추진해온 소송을 ‘각하(1심 판결)’한 것에 대한 불복이다.

각하는 패소 판결이라는 점에서는 기각과 같지만, 원고의 주장·입증이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소송요건을 구비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가령 제소기간이 지났거나 중복제소를 한 경우 ‘부적법한 소 제기’로 각하된다. 1심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청구권이 있을지언정 이 청구를 소송을 통해 제기할 수 있는 권리(소권)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1965년 체결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 협정)’에 따라 소를 제기할 권리가 소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청구권 협정의 해석에 관한 일본의 입장과 같다.

1심 판결은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1심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정면으로 반했다. 2018년 판례는 여운택 등 4명의 피해자가 2005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1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에 관한 것으로, 1·2·3심, 파기환송심(2심), 재상고심(3심) 등 5차례 판결을 거쳐 청구권 협정의 해석에 관한 치열한 법리 다툼 끝에 나온 것이었다.

청구권 협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한다면서,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여기서 ‘청구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이 2018년 대법원 판결의 핵심 쟁점이었다.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청구한 것은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전범 기업의 불법행위로 입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위자료)이었다. 대법원은, 위자료는 협정상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즉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을 협상하던 당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나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부인했다. 즉 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 자체가 부정되었다면,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청구권에 강제동원으로 인한 위자료가 포함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1심 법원이 이런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판결을 한 것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급심 법원이 그동안 변경된 상황을 잘 반영하거나 또는 새로이 설득력을 갖춘 법리를 제시하면 판례를 뒤집을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대표적 사례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법 위반이라는 2004년 대법원 판례에도 불구하고, 1심 법원들은 유사 사건들에서 잇달아 이에 반하는 판결을 선고했고, 결국 2018년 판례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2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의 재판부는 대법원과 달리 판단하면서도, 그 사이의 사정 변경을 반영하거나 새로운 법리를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법관의 법률 외적인 사견(私見)이 구구절절 제시되었다. 그 사견은 다음과 같다.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어 강제집행이 이루어지면 국제적으로 역효과가 초래된다. (청구 자체가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하고, 더 나아가 한·미 동맹에 균열을 내는 것으로)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원고들의)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헌법 제103조, 제40조, 제109조 위반

2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 각하 판결을 내린 김양호 판사.

이 판결은 크게 3가지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재판부는 원고가 승소해 전범 기업들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하는 경우 피고 기업들이 청구이의의 소(강제집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단을 구하는 소송)를 제기할 것이라는 점을 각하 사유로 들었다. 승소 판결의 확정, 배상 미이행, 강제집행, 청구이의의 소는 모두 미래의 일이다. 이처럼 가정(강제집행)과 이를 전제로 한 재가정(청구이의의 소)을 판결 이유로 삼은 것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심판하라’는 헌법 제103조에 반하는 등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다.

둘째, 판결 결과 발생할 수 있는 한·일 관계 악화 등의 문제는 외교권을 관할하는 행정부의 고유 영역이다. 사법부는 이러한 고려 없이 법리적 판단만을 해야 한다. 1심 재판부가 한 ‘판결 외교’는 삼권분립을 규정한 헌법 제40조 또한 위반하고 있다.

셋째, 근대법과 사법 시스템은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보장·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번 판결은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권리 위에 두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판결이라는 비판도 면하기 어렵다.

판결 내용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 판결 선고일은 6월10일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6월7일 기습적으로 선고를 단행했다. 사전 연락을 취했다지만 85명 원고 모두에게 통보가 간 상황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다” “법원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선고기일을 변경했다”라고 밝혔다. 선고 당일 법정에 최대한 사람들이 덜 오도록 의도했다는 뻔뻔한 고백과 다름없었다. 판결을 공개하라는 헌법 제109조는 이렇게 무시되었다.

이런 판결이 나올 조짐은 이미 있었다. 재판부는 앞서 3월29일 배춘희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1차 위안부 손해배상청구 사건(2013년 일본을 상대로 제기)’에서 승소(2021년 1월)한 뒤 낸 ‘소송비용 관련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 소송비용을 추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역시 법률 외적인 사유, 즉 “국가적 위신”이나 “헌법상 국가안전보장” 따위가 판결 이유로 기재되었다.

과거사 관련 소송은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위에서 봤듯이, 2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은 항소심에서 다시 판단을 받게 되었다. 이용수 등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 20명이 2016년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사건(‘2차 위안부 손배 사건’)도 4월21일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재판장 민성철)에서 각하된 후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1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의 원고들은 13년 만의 극적인 승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상을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피고 신일철주금의 국내 자산에 대한 지난한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 중이다(한·일 무역전쟁을 촉발한 바로 그 강제집행 사건이다).

1차 위안부 손배 사건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은 소송비용 관련 사건의 패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다. 그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재산명시신청(강제집행을 위해 패소 피고에게 보유 재산을 모두 밝히라는 법원 명령을 구하는 절차)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51단독 남성우 판사는 6월9일 일본 정부에 재산을 명시한 목록을 기한 내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2차 강제동원 손배 사건의 1심 각하 판결일로부터 이틀 뒤였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배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과 무관하고,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라는 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확정판결에 따라 채무자에 대한 강제집행의 실시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대일 관계의 악화, 경제보복 등의 국가 간 긴장 발생 문제는 외교권을 관할하는 행정부의 고유 영역이고 사법부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이 사건 강제집행 신청의 적법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고려 사항에서 제외하고 법리적 판단만을 해야 마땅하다”라고 적시했다. 일부 법관이 자의적인 애국심에서 그릇된 판결을 하여도, 결국에는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기엔 아직 이르다.

기자명 노주희 (경기국제평화센터장·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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