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합류한 세 네팔 노동자는 지금 조수로서 충분한 ‘이치닌마에 (숙련자)’가 되었다. ⓒ박철현 제공

매일같이 각 현장의 출근 보고를 받는다. 카카오톡 단체 방에 들어와 있는 목수 및 설비기술자, 조수들은 모두 17명이다. 세 명은 데쓰야공무점 직원이고 한 명은 그룹 본사의 경리 담당자다. 현장은 기본적으로 두 군데 이상이다. 많을 때는 다섯 군데가 될 때도 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각 현장에서 올라오는 출근 보고를 엑셀 파일에 입력한 후 각 현장의 납기 일정표를 들고 현장을 둘러본다. 납기 일정이 촉발할 때는 나도 현장에서 합판·석고보드를 나르기도 한다. 대표인 내가 석고보드를 나르고 있으면 십장급 목수, 베테랑 설비사들도 나와서 “아이고 사장이 이런 거 하면 어떡하냐”라며 같이 나르는 경우가 많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급에 맞게 대우해주는 마음가짐이 끈끈한 유대감을 만들며 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지난해부터 자질구레하지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운반·청소 등의 일이 편해졌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일자리를 잃은 네팔 친구 세 명이 추가로 현장에 투입됐기 때문이다. 데쓰야공무점이 설립된 2018년 2월 초창기부터 줄곧 우리 현장에 있었던 힘 좋은 네팔 친구가 있다. 역도선수 출신이다. 주로 힘쓰는 일을 시켰는데 차원이 다르다. 남들이 석고보드 두 장씩 나를 때 이 친구는 네 장씩 나른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사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이맘때 합판과 석고보드, 시멘트 등을 힘겹게 나르고 있는 중년의 우리들이 안쓰러웠는지, 일이 끝난 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일자리가 사라진 친구들이 있는데 여기 데리고 오면 어떨까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자리를 가장 먼저 잃는 직종이 서비스업이었다. 동남아시아 이주민들이 일본의 서비스업종에서 일을 많이 한다. 그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데쓰야공무점은 일이 매우 많은 시기였기 때문에 네팔 친구에게 ‘비자 문제만 클리어된다면 얼마든지 고용하겠다’고 했다. 그는 가족비자, 난민비자 등 취로 자격에 문제가 없는 네팔인 세 명을 데려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있었던 역도선수 네팔인은 한 달에 45만 엔, 새롭게 들어온 이들은 33만 엔에서 40만 엔을 받는다. 한국 돈으로 대략 350만~480만원이다. 이들은 월급이 입금될 때마다 항상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직접 힘든 일을 하고 받는 돈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매번 그런다. 한번은 네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친구들이 사이타마, 군마에서 당한 거 생각하면 여기는 천국이에요.”

ⓒ박철현 제공

사이타마나 군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러느냐고 묻자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네팔어로 대화하다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 그날 저녁 사무실로 돌아와 사이타마, 군마, 네팔 등등의 단어를 넣고 검색을 했다. 그러자 〈아사히신문〉의 ‘실종마을, 돈도 일도 없다’라는 르포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베트남에서 온 실습생 부반증 씨(36)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브로커에게 돈을 지불하고 겨우 일본에 왔다. 이후 적은 월급과 가혹한 노동환경을 버티지 못해 도망친 후 ‘실종마을’이라 불리는 지역에 정착했다. 기사에서 전하는 ‘실종마을’은 사이타마현 가미사토(上里)부터 군마현에 이르는 기타칸토(北関東) 일대를 지칭한다. 철강, 플라스틱 공장과 논밭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시골 공업단지를 의미한다. 이 공업단지에 근무하는 이들은 대개 일본계 브라질인과 동남아 실습생이다. 일자리를 잃거나 부반증 씨처럼 다른 지역 공장 등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이 지역의 자기 지인들에게 잠시 살게 해달라고 부탁해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부반증 씨는 일본에는 있지만 행정기관이 파악할 수 없는, 즉 실종 상태가 된다. 이런 식으로 실종마을에 모인 전국의 동남아 실습생들이 약 2000명에서 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기사에는 8년 전 일본에 온 한 베트남인의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도쿠시마현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는데 한 시간에 양말 2000족을 만들라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700족이 한계였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7시부터 밤까지 일했는데 월급은 10만 엔, 공장이 제공한 6조 다다미 방(3평) 하나에 7명이 살았다. 수면시간은 3시간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도망쳤고, 결국 여기(실종마을)로 왔다.”

얼마나 많은 ‘실종마을’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 역시 일본 사회에서 20년 동안 생활해온 이방인이다. 일본은 최저임금 제도가 잘되어 있고, ‘노동자 편들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동환경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일을 하면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경우 후생노동성에 고발하면 거의 90% 이상 노동자가 이기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던 일본과 너무 다른 현실이 지금 현재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장 출근 보고를 받은 후 네팔 친구들이 일하는 현장으로 갔다. 휴식시간에 사이타마, 군마 이야기를 했던 친구한테 녹차 페트병을 건네면서 말을 걸었다.

“어제 말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사이타마, 군마에 동남아 특히 베트남인들이 모이는 ‘실종마을’이란 게 있더군요. 거기에 네팔 친구들도 많이 있나요?”

그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팔 사람들은, 거기 말고 다른 동네에 있어요. 그런 곳에 가는 친구들은 결국 일본 생활을 접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이죠.”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 그리고 ‘부자 나라’ 이미지에 혹해 거금의 돈을 마련해 ‘재팬드림’을 꿈꾸며 왔다가 온갖 고생을 한 후에 귀국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지금은 코로나로 비행기표 가격이 비싸서 쉽게 돌아갈 수도 없죠.”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니 가슴이 아프다. 기타칸토 지역에만 2000~3000명 규모의 탈주자 그룹이 있다. 전국으로 확대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실종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일까.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을 월 10만 엔에 부려먹는  도쿠시마의 봉제공장 같은 곳은 얼마나 있을까.

미증유의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는다. 일본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일본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다만 기업의 경영자로서 내가 할 일을 생각한다. 거시적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경영자로서 지금 현재의 삶을 두려워하는 개별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정확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 일상의 루틴을 수행하는 게 내게 주어진 미션이다. 나의 네팔 친구들이 애초에 꿈꿨던 ‘재팬드림’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1년 전부터 합류한 세 명의 친구들은 조수로서는 충분한 ‘이치닌마에(一人前, 숙련자)’가 됐다. 그들이 지금 흘리고 있는 땀이 언젠가 결실을 이루길 간절히 바란다.

기자명 박철현 (일본 데쓰야공무점 대표·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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