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형상으로 나타내려 했던 루이 다게르의 사진(1896년).

투시 카메라는 외피를 뚫고 그 안의 뭔가를 들여다보는 기능을 갖고 있다. 과거엔 SF 영화에서나 등장했던 이 기술이 현실에 구현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적외선 투시 카메라 기능을 탑재한 회사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 상상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초월하기까지 한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사진 기술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다.

19세기 말 발명된 엑스레이는 그 이전엔 관찰할 수 없었던 인체의 내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사진의 엄청난 잠재력을 입증했다. 당시 엑스레이는 ‘새로운 사진(new photography)’이라고 불렸다. 사진 기술이 인체 내부 같은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리라는 희망이 대중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 이후 사진 기술은 계속 발전해서 숨어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볼 수 없는 세계는 인체 내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는 세계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영혼 같은 게 아닐까. 사진이 발명되기 전인 18세기의 소설에서 사람의 생각을 이미지로 만드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염원이 사진 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온 것이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에는 누군가가 남긴 염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영험한 녹나무가 등장한다. 녹나무가 누군가의 유언을 기록했다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누군가에게 재생해주는 미디어 구실을 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기록할 수 있는 영상 미디어가 있다면 어떨까’라고 상상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사진으로 찍어낼 수 있다면 신비감과 스릴이 사라져서 삶이 건조해질까?

이런 측면에서, 1888년 사망한 언어학자의 두뇌 사진을 촬영했던 미국 뉴욕의 사진가 이야기는 꽤 흥미롭다. 그는 현미경으로 사망자의 뇌를 확대해서 촬영했는데 그 사진에서 고대 상형문자 같은 형태를 발견했다고 자신의 에세이에 썼다. 하지만 그가 촬영했다는 사진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문제다. 사진가 자신이 그런 결과를 간절히 염원했을 것이라는 추정 이외엔 과학적으로 어떤 근거도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영혼을 이미지로 나타내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 사진가 루이 다게르는 30년 이상 인간의 생각을 사진으로 나타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예컨대 피실험자에게 브랜디 병을 한참 응시한 뒤, 손가락을 현상액에 담긴 사진필름 뒷면에 대고 5분간 그 병을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피실험자가 머릿속에 떠올린 브랜디 병의 형상(엄격하게 말하자면 비슷해 보이는 형태)이 필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피실험자의 상상이 손가락을 통해 필름으로 옮겨졌다는 주장인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다.

‘속 보이는 사진’이 가능한 세상

이러한 믿음이 사진가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널리 퍼졌던 것은 사진이 실재하는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지표(index)’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데스마스크(죽은 사람의 얼굴을 석고 등으로 뜨는 것)라고 했던 것처럼, 사진은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그대로 찍어내는 ‘진실의 매체’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믿음 위에서 ‘사고(思考) 사진’ 혹은 ‘심리 도상’은, 우리의 사유 혹은 영혼이 우리의 몸 밖으로 광선처럼 흘러서 필름에 남겨진 흔적으로 여겨졌다. 물론 다게르의 사진은, 정확하지 못한 현상액의 배합과 필름에 닿은 체온으로 만들어진 우연한 결과물이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루이 다게르가 자신의 사진을 발표한 지 이미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속된 말로 ‘속 보이는 사진’이 가능하다면 세상이 좀 더 정직해질 것인지는 나도 궁금하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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