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197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소설을 실었다. 제목은 〈50년 후, 디 파이 나인 기자의 어느 날〉. 배경은 2020년이다. 주인공인 기자는 연료전지로 가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화상통화를 한다. 자동차의 이름은 ‘귀요미19’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도 등장한다.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가 서른 살에 쓴 작품이다. 같은 2020년을 다루지만,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탐사에 나선 독수리호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1989)와 결이 좀 다르다.

20세기 창작자가 상상한 2020년에서 한 가지 빠진 키워드가 있다. 바로 ‘SF(과학소설)’다. 올해는 국내 SF 창작물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은 해다. 증강현실·가상현실·인공지능을 다룬 SF 앤솔러지 드라마 〈SF8〉이 OTT 플랫폼 웨이브에 공개돼 좋은 반응을 얻었고, 한국 최초의 우주 영화 〈승리호〉와 복제인간을 다룬 〈서복〉도 공개를 앞두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SF 문학의 약진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 1월1일부터 9월20일까지 한국 소설의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30% 늘었는데 특히 SF가 5.5배 뛰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도 소설 분야 매출에서 과학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1년 3%대에서 2019년 약 6%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김초엽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15만 부를 돌파하며 ‘SF 전성기’를 견인했다. 알라딘의 한국 소설 담당 김효선 MD는 “과거에 비해 베스트셀러라고 할 만한 SF 작품이 늘고 있다. 김초엽·김보영·문목하 같은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장르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정세랑 작가가 대표적이다. SF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는데, 감성적인 SF가 다수 나오면서 반응이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30여 년간 SF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온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SF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걸 체감한다. 앞선 25년은 문화계와 출판계가 SF의 주된 접점이었다. 최근 5년은 기업, 정부 출연 연구소, 학교 등 관심을 보이는 곳이 다양해졌다. 특히 과학과 문화 예술의 융합을 기획하는 각종 기관과 단체의 문의가 많다. “21세기에 접어들고도 몇 년 동안은 SF가 ‘그들(SF 독자)만의 세계’라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엔 출판되는 국내 작가의 SF를 다 챙겨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모두 성장해 그럴 엄두를 못 낸다.” 순문학 작가 지망생의 SF 공모전 지원 사례도 늘었다. 문학시장에서 SF 비중이 커지며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왜 지금 시기, SF일까. SF 전문 출판사 허블의 김학제 편집자는 ‘SF다운 세계를 실제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2016년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대결을 지켜보던 대중들이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 SF가 부흥한 시기도 우주선이 달에 다녀온 이후와 겹친다. 본격 문학이 문장의 층위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면 SF는 세계관을 확장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게 매력인 것 같다.” 허블이 8월 출간한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은 두어 달 만에 2만 권 이상 판매되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팬데믹이라는 시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장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위치추적 등) 통신에 의한 통제를 겪고 있다. SF에서만 보던 장면들이다. 직접 경험하다 보니 과학에 관심이 많아졌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SF 문학 무크지 〈오늘의 SF〉 창간사에서 정소연 작가는 ‘SF는 지금 이곳 너머를 말하는 장르이지만, 한편으로 SF라는 장르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썼다. ‘독자도 창작자도 비평가도 엄연히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독자들의 호응도 주목할 만하다. 알라딘에 따르면, 과학소설 독자 중 20대 여성이 1.4%(1999~2009년)에서 12.6%(2010~2019년)로 늘었고, 30대 여성은 11.1%에서 18.2%로 늘었다. 김효선 MD는 “SF는 사회가 바뀌길 원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그 세대는 정의로운 마음이 좀 더 강한 시기다”라고 말했다. 김겨울 작가의 분석도 비슷하다. 그는 ‘SF가 ‘지금, 여기’가 아닌 ‘언젠가, 어딘가’의 장르라면, 무엇보다도 현실에 답답해하는 어떤 독자들이 출현했음을 직감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사랑받는 SF 소설이 주로 여성 작가가 쓴, 여성이 주체가 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SF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매개체’라고 설명한다(‘책 만드는 파주출판도시 소식’ 2020년 가을호).

‘지금 여기’의 화두는 페미니즘이고, 20·30 여성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다. 〈SF는 정말 끝내주는데〉의 심완선 SF 칼럼니스트는 ‘성차별 철폐의 역사와 SF 문학사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SF의 시초를 1818년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으로 본다. ‘SF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세계를 바꾸는 장르’이고, ‘성별과 사회구조는 변화를 말하는 데서 중요한 주제’다.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 퀴어 등 현실에선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은 존재가 SF 세계에서 다르게 그려지기도 했다. 독자들은 그들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종차별이 만연한 1960년대 미국에서 공중파 최초로 백인과 흑인이 키스하는 장면을 보여준 드라마가 〈스타트렉〉이었다.

20·30 세대가 SF 장르의 문법이나 규칙에 익숙해진 것도 한 요인이다. 2020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경희 작가는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에서 한국인이 SF를 매우 좋아한다고 말한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27편 중 8편이 SF이고, 역대 박스오피스 100위 중에는 21편이 SF다. 게임시장 역시 SF 설정이 자연스럽다. 웹툰과 웹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곁엔 언제나 엄청난 규모의 SF 팬덤이 존재해왔다. 다만 각자의 방에 앉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작품과 저 작품이 실은 같은 장르이며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했을 뿐이다.’

SF 전성기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니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의 전혜진 작가는 수십 년간 언론과 평단에서 일컫던 ‘한국은 SF의 불모지’라는 말이 얼마나 관성적이고 게으른 표현인지 설명한다. 지금 주목받는 김초엽·천선란 등의 젊은 작가 이전, 2000년대에 김보영·김창규·배명훈·정소연 작가가 있었다. 전혜진 작가는 PC통신 시절 SF의 ‘중시조’라 불리는 듀나가 있었고, 그보다 이전에 한국 SF 만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진·김혜린·신일숙·강경옥 등의 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는다.

ⓒ연합뉴스‘2019 서울국제도서전’의 모습. 최근 들어 SF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늘고 있다.

오랜 시간 지속된 창작자들의 노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도 지금의 붐이 오랜 시간 축적된 SF 팬덤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가 11년 전 도서관 문을 열자 찾아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SF를 즐기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고 했다. “최근 예순 넘은 분들이 수백 권씩 책을 기증했는데 외국 원서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SF 컨벤션이나 각종 어워드 등의 행사를 통해 SF 작가, 팬으로 활동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한국SF협회가 생겼고 한국과학소설 작가연대도 탄생했다. 그렇게 조금씩 저변을 넓혀온 거다.”

그의 말대로 무엇보다 창작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배명훈 작가는 〈SF 작가입니다〉에서 ‘한국어로 SF를 쓰는 작가가 직면하게 되는 실질적인 장벽’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주인공이 한국인인 SF를 써도 되는가? 서울 광화문 상공에 UFO를 띄울 수 있는가? 10권 이상의 SF 단행본을 낸 이후에도 그는 SF를 쓸 때 이 점이 망설여졌다. 해외 작품에 익숙한 SF 독자에게 한국인 주인공과 한국 배경의 시공간이 그만큼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저 계속해서 써내려갔고 이제 아무도 그걸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다.

전선은 또 있었다. 김보영 작가는 2004년 데뷔 후 첫 단편집을 내려고 했을 때 국내 출판사로부터 ‘한 번도 국내 작가의 단독 SF 단편집을 출간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첫 장편을 쓴 뒤에는 목적어만 바뀌었다. 한 번도 국내 작가의 SF 장편을 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무명이거나 글이 형편없어서 못 내주겠다는 말보다 더 큰 좌절을 느꼈다고 한다. ‘성소수자라, 여자라, 흑인이라 책을 못 내겠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게 들렸다.’ SF는 한동안 변방의 장르로 분류됐다. 그는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순수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문학은 순문학이다. 과학소설이 있는 것은 과학이 세상의 일부라서 그렇다’고 말한다(〈기획회의〉 제461호). 김 작가는 영어권 최대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와 계약해 내년 영문판 출간을 앞두고 있다.

2004년 시작된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은 김보영·배명훈·박성환·김창규·정소연 작가를 배출했으나 3회 만에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에 비해 통로가 다양해졌다. 2016년 시작된 한국과학문학상은 김초엽·천선란·황모과 작가 등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낙원과학소설상, 안전가옥 공모전 등이 있고 한국 최초의 장편 SF를 쓴 문윤성 작가를 기념하는 ‘문윤성 SF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아작·허블·구픽·안전가옥 같은 SF 전문,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가 생겨났다. SF를 비롯한 장르문학 플랫폼 브릿G도 있다. 지난해 SF 문학 무크지 〈오늘의 SF〉가 출간됐다.

SF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지속될까. 전망은 낙관적이다. SF는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스토리텔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운명을 같이한다. 박상준 대표는 “장밋빛 미래보다는 과학기술이 초래할 상대적 어두운 면을 애써 들춰내 알리는 게 SF다. 기후위기, 팬데믹의 빠른 확산 등은 과학기술 때문에 겪는 곤란함이다. 미래에도 기술력 때문에 계급이 나뉠 여지가 있고 이건 SF가 줄기차게 해오던 얘기다. SF에 왜 디스토피아가 많으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데, 작가들이 미래를 비관적으로 봐서라기보다는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SF가 널리 읽히면 읽힐수록 인류 문명이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50년 전에 쓰인 김승옥의 SF도 놀랄 정도로 2020년과 닮아 있지만, 작가 스스로는 ‘당대의 현실을 담았다’고 말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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