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김초엽 작가는 2020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일본 최대 SF 출판사인 하야카와와 계약을 맺었다.

누군가 사인을 요청했다. 김초엽 작가가 커다란 백팩에서 펜을 꺼낸 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우빛속)〉 맨 앞 장을 펼쳐 이렇게 적었다. ‘우주의 모든 사랑을 담아.’ 지난해 6월 나온 그의 첫 소설집이다. 지금까지 약 15만 부가 판매되었다. 그의 ‘사인용’ 펜은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보라색이었다. 〈우빛속〉 초판 책 표지의 제목 색깔과 비슷했다. 사인 구절 역시 그의 작품과 닮아 있었다. ‘슬픔으로 가득한 우주에서도 똑바로 날아갈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준다(정세랑 작가)’는 점에서 그랬다.

지난해, 김초엽이 왔다. 20·30 여성 독자들이 그를 환대했다. 인생 첫 SF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20일까지 SF 판매량이 예년보다 5.5배 늘었고 그 흐름을 견인한 건 줄곧 베스트셀러 순위를 지키던 〈우빛속〉이었다. 생화학을 공부하는 과학도였던 작가는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등단했고, 책을 출간한 첫해 각종 서점과 언론사가 꼽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올해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 2020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일본 최대 SF 출판사인 하야카와와 출판 계약을 맺었다. 최근에는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초고를 완성했다.

김초엽은 ‘탐구하고 천착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주로 여성 과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도 주요 등장인물이다. 지난 10월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홍보대사로 있는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을 앞두고 있었다. 사인을 부탁한 독자에게 ‘왜 하필 김초엽인지’ 물었다. “과학이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슬퍼하고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낙관과 긍정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코로나19 시기,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밖에 잘 안 나갔다. 계획되어 있던 행사와 해외 일정이 많이 취소됐다. 중국·일본에 가기로 했는데 기약이 없게 되었다. 아쉽기도 하지만 다른 분들이 피해를 본 거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종이라는 걸 감사히 여기고 있다. 최근엔 급성염증을 앓았는데 오래 앉아 있으면 생기는 병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

김보라 감독이 〈우빛속〉에 실린 ‘스펙트럼’을 영화화한다고 들었다.

영화 제작사 대표가 ‘스펙트럼’을 읽고 김보라 감독에게 연락했는데 마침 감독님도 책에서 그 작품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하더라.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의 2차 판권이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으로 계약되어 있거나 논의 중인데 ‘스펙트럼’만 없었다. 우연이 겹쳐서 바로 성사되었다. 김보라 감독님이 추구하는 미학을 좋아한다. 감독님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게 좋고 재밌을 것 같아 기대하는 마음이다.

책이 나온 지 1년4개월이다. 많은 주목을 받았다.

좋은 점도 있고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 당분간 작가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좋다. 몇 년 정도는 다른 걱정 안 하고 글만 써도 될 것 같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고 얘기해주는 독자 분들이 많다. 소통하는 게 재미있다. 걱정되는 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 어디까지나 과거의 글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잘 써나가는 게 중요하다. 적어도 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내놔야 할 것 같다. 눈이 높아져서 쓰고 있는 글이 마음에 안 들기도 한다. 고민이 깊어졌다.

독자의 반응 중 어떤 게 인상적이었나?

지금까지 여성 과학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별로 흔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 인상 깊게 봐주어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을 잘 안 해줬다. SF의 특정한 요소들, 가령 우주여행을 한다거나 외계인을 만난다거나 하는 게 마이너하고 인기가 별로 없었는데, 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흥미를 느끼고 더 찾아보고 싶다고 하니 영업에 성공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즐겁다.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나?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하는 건 아니고 자주 보고 경험한 것이어서 자연스럽다. SF 특성상 과학자가 나오면 편하기도 하다. 미스터리를 풀어가거나 탐구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라 학자가 어울린다. 여성 과학자를 너무 자주 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다른 분들이 덜 썼으니 괜찮지 않을까.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10월16일 서울 명동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김초엽 작가(오른쪽).

20·30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특별하다.

최근 서울국제도서전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글을 썼다. 지금까지 세대를 크게 의식해본 적은 없는데 〈우빛속〉 주 독자가 20·30 여성이고 밀레니얼 세대와 겹쳐서 생각을 좀 해봤다. 내가 SF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갖고 있던 SF 독자에 대한 이미지와 책을 낸 후 만난 독자들이 너무 다르다. 내가 상상한 독자는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남성에 이공계 출신이 많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실제로 소설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나와 비슷했다. 출신이나 배경은 좀 다를 수 있어도 보통 20·30 세대의 정서나 경험을 공유하더라. 그 점이 되게 좋았다. 특정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쓸 뿐인데 그게 나와 비슷한 독자들한테 통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다. 글을 좀 편하게 쓰게 되는 계기였던 것 같다. 같은 시대와 경험을 공유하니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글 쓸 때 생략하는 것도 많은데 빠르게 캐치해서 알아봐주시더라. 인물이 어떤 경험을 할 때 세세하게 감정 묘사를 안 해도 너무 잘 안다. 그게 좋은 일이고 힘이 되더라.

SF 전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것 같다.

엄청 높아졌다. 처음으로 한국 SF에 관심을 갖게 된 게 2010년 정도, 고등학교 2~3학년 때였다. 그때는 한국 SF뿐만 아니라 SF 전체를 사도 책장이 꽉 차지 않을 정도로 적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국내 작가들의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고무적인 게 SF 비평서가 나온다는 점이다. 비평서는 독자가 적다. 앞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질 만한 독자들이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비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SF 자체에 대해 얘기하는 논픽션이 많이 출간되는 게 예전엔 보기 힘들었던 현상 같다.

곧 나올 장편소설은 멸망 이후의 미래사회를 그린다. 생화학 전공 지식을 드디어 써먹었다던데.

온실을 소재로 한다. 개인적으로 온실을 좋아한다. 자연적이면서도 인공적이라 느낌이 좀 특별하다. 이국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기도 하다. 자연과 인공의 공존이라는 주제에 꽂혀 있기도 했다. 그것에 집중하며 썼는데 읽는 분들은 다른 걸 볼 것 같다. 생화학 지식을 써먹었다고 말하긴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과학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SF에서 과학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클리셰만 가지고도 쓸 수 있다. 과학적 새로움이 등장하지 않아도 디스토피아 자체를 즐길 수 있지 않나. 그런 느낌의 소설이다.

과학 전공이 소설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지식보다는 관심사에 영향을 준다. 아까 말한 생화학 지식도 사실 한 문단이고 별로 중요하게 써먹진 않았다. 다만 과학 전공이다 보니 과학 전반에 대한 관심이 자료 조사할 때 도움이 되기는 한다. 과학 영역에서 뭔가 알아보고 싶으면 어떤 키워드에서 시작하면 되겠지 이 정도로 간략하게 알고 있다. 쓸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정도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중학교 때 화학의 원리를 배우며 재미를 느꼈다고 했는데.

원자, 원소, 분자의 차이를 배웠다. 원소는 주기율표의 수소, 산소, 탄소 이런 거고 원자는 말 그대로 입자다. 그런데 지구나 우주에서 실제로 상호작용하는 건 분자 단위다. 어떤 원자 몇 개가 결합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를 예로 들면 탄소 하나에 산소 하나 결합하는 거랑 산소 두 개가 결합하는 거랑 완전히 다르다. 다른 분자다. 그걸 배우며 굉장히 흥미로웠다. 수소면 대체에너지이고 하는 식으로만 생각했는데 수소 원자, 탄소 원자 이런 식으로 구체화된 걸 배우고 분자의 상호작용에 대해 알게 되니까 내가 사는 이 세계가 구체성을 띠는 것 같았다. 추상적인 세계에서 구체적·물리적인 세계로 온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과학에 대해 많이 찾아보고 책도 읽으며 사고관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기술로 인해 달라진 세계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내 작품의 특징이라기보다 SF 자체가 그렇다. SF는 지금과 달리 변화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걸 전반적으로 스케치하기보다 소설이기 때문에 한 인물의 입장에서 그린다. 난 그중에서도 너무 탁월하거나 대단한 영웅보다 결함도 있고 부족한 개인을 쓰는 게 재미있다. 그러다 보니 변화한 세계를 주도하고 이끄는 인물보다 변화에 휩쓸리기도 하고 혼란을 겪는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소수자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단한 사람보다 어딘가 결함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게 SF뿐만 아니라 문학의 특징인 것 같다. 그런 건 있다. 과거의 문학은 주인공들이 소외를 경험하지만 소외의 카테고리가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가령 빈곤한 남성이 문학의 중심인물이었다. 분명 소외를 다루지만 특정한 소외만 주목받는 느낌이었다면 최근에는 시선이 좀 다양해진 것 같다. 영미권에서는 좀 더 빨랐다. 과거의 SF에도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했지만 특정한 계층 사람들만 경험하는 혼란을 다루었다. 현대로 오며 좀 더 다채로워졌다. 흑인 여성 작가들이 지금 영미권 SF를 이끌고 있다. 과거엔 주목받지 못했던 소재가 이야기의 중심에 오고 있다.

첫 습작 당시 주인공이 제임스라는 백인 남성이었다고. 지금은 대부분 한국 여성이다.

재미있게 읽은 작품의 주인공이 다 남자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남자 주인공을 많이 썼다. 그렇다고 여자를 안 쓴 건 아니다. 최근 여성 서사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많아진 것 같다. 〈여명기〉라는 단편 만화집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여성 서사이면서도 로맨스가 아닌 작품들을 모았다. 로맨스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좋아하지만 여성 이야기가 그에 한정되다 보니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충분히 서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데 갑자기 로맨스로 빠지기도 한다.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에 대해 지적하는 걸 보니 공감이 갔다. 여성 서사는 숫자 자체가 적지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서사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로서의 성찰이라기보다 독자로서 드는 아쉬움이 글쓰기에 반영되는 것 같다.

SF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배경으로 ‘대중이 윤리적이면서 재밌는 글을 읽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예전에 비해 폭력의 재현을 독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그대로 옮겨오는 것보다 비틀어보는 걸 좋아한달까. 현실을 그대로 보는 것에 지친 분들이 많고,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난 뒤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느껴지기보다는 여운이 남는,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다. SF가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더라.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재밌게만 써도 장르소설로는 좋은 소설이다. 너무 재밌게 쓰면 평가가 좀 박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주제의식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나이도 많지 않다 보니 뭔가 설파하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각하자는 느낌으로 하고 있다.

독자와 창작자로서 SF의 매력은?

현실과 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 같다. SF를 쓰기 전부터 느낀 건데 나는 뭔가 글로 쓰려고 하면 일단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경험한 사건을 쓰면 감정적이 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팬데믹 앤솔로지’에 참여했는데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 사람마다 작법의 차이일 거 같은데 나는 거리 두는 걸 좋아한다. 독자로서 좋아하는 이유는 또 다르다. 그냥 가상세계가 좀 더 재밌다. 현실은 좀 답답하지 않나. 현실을 다룬 이야기를 보면 이 인물이 뭔가 크게 바꿀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변화해도 개인이나 개인을 둘러싼 작은 세계 정도인데 SF에선 훨씬 큰 걸 기대해볼 수 있다.

기술이 장애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시사IN〉에 연재하기도 했다.

곧 책으로 나온다. 장애가 기술과 결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얘기다. 최근 기술을 통해 장애인들을 회복시켜주는 광고가 많이 나오는데,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학술적 레퍼런스를 검토했다. 해외에 테크노에이블리즘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기술 중심 장애차별주의’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비판받을 텐데 이상하게 장애 문제에선 그런 얘기를 해도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과연 옳을까. 그걸 검토하고 미래가 아니라 현실에서 기술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은 어떤지 살펴보려 한다. 기술이 장애인을 억압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복합적이다. 미래에 어떻게 장애 중심적인 기술을 설계할 것인가 하는 얘기로 이어진다.

부모님이 시인, 음악가다.

(시인인) 엄마와는 글 얘기를 많이 한다. 쓰다 막히면 가서 찡찡거리고. 글을 잘 봐주신다. 읽고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고 좋다고 하면 좋은 거다. 아빠랑은 글 얘기를 굳이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술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아빠도 성실한 창작자다. 부지런하고 항상 뭔가 만들고 있어서 영향을 받는다.

첫 책을 내고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쓰는 글에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큰 자신감은 아니고 약간이다. 글이 내 마음에 들면 독자들 마음에도 들겠구나 이 정도까지는 왔다. 예전엔 그 확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충분히 하면 괜찮구나 이 정도 자신감은 생긴 것 같다. 두 번째 단편집에 좋아하는 작품이 많이 실릴 텐데 아직 나오려면 멀었다. 연재를 끝낸 장편은 몇 달 리뷰를 거쳐 정식 출간할 예정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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