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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방역 체제는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 불투명하고 아득하다.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방역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자양분으로 정치투쟁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는 그들은, 전체주의적 ‘거대 권력’이 방역을 핑계로 영업과 집회, 이동(확진자 동선 추적)의 자유를 침범한다고 주장한다. ‘방역농단’이란 용어까지 사용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군사독재나 민간인 학살까지 전면적으로 옹호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개인의 자유)’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개인들과 사회공동체까지 배려하는 이념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지나친 소음으로 아래층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은 생산활동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에 대해 적절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 층간소음을 호소하는 이웃이나 환경오염의 비용을 청구하는 국가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슨 ‘주의자’라기보다는 ‘철부지’로 불러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를 조화시키는(혹은 조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특유의 이론적 틀 덕분에 자유주의는 성공적 이념이자 사회조직 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자유주의는 시장을 통해 수익 추구와 소비의 욕망을 해방시켰다. 전통적 도덕과 관행들을 해체해서 개인들이 점점 더 법률 이외의 규범들에 속박되지 않는 쪽으로 전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복지국가를 통해 ‘배고프지 않을 자유’라는, 인류사에서 낯선 주제까지 사회적 논의의 무대 위로 올렸다. 자유주의는 오늘날 인류의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런 자유주의가 엄청난 시스템적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이번 호에 게재된 송지혜 기자의 ‘비건(엄격한 채식주의)’ 관련 기사를 읽다가 덜컥 두려워졌다. 기사에 따르면,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열대우림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버린 것은 ‘육고기 공급’ 때문이다. 아마존 벌채 가운데 80%가 “소를 키우거나 가축 사료용 대두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이 같은 파괴는 결국 기후 온난화, 미국 서부 지역의 동시다발적 산불, 바이러스 팬데믹 같은 환경 재앙으로 이어진다. 결국 인류가 환경 재앙으로 인한 생존권적 타격을 피하려면, 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보장되고 권장되었던 개인의 무제한적 욕망 추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유주의를 비판하긴 쉽다. 그러나 ‘육고기를 끊거나 줄이라’는 규범을 기꺼이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부터 자신이 없다. 지금의 ‘우리’는 ‘자유주의 이후’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인류의 미래까지 보장할 수 있는 삶의 새로운 조직원리는 무엇일까.

기자명 이종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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