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8월16일 서울 마포구 식당 ‘음공’에서 채식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강보혜씨(왼쪽)와 이다빈씨가 요리를 하고 있다.

말복 다음 날인 8월1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파스타 식당 ‘음공’에는 육개장 냄새가 퍼졌다. 냄비에는 고기 대신 채소가 가득 담겨 끓고 있었다. 각종 채소로 국물을 내고 중국식 건두부와 포두부, 고사리와 시래기를 넣었다. 고춧가루와 국간장으로 맛을 냈다. 멸치육수나 굴소스 같은 동물성 식재료는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

이날 하루, 강보혜씨(27)는 파스타 가게를 채식 한식집으로 바꾸었다. 메뉴를 궁리하던 그는 고기 대신 채소를 푹 끓여서 몸보신용 밥상을 차리기로 했다. ‘육개장에 고기가 빠지면 육개장 맛이 날까’ 하는 걱정은 기우다. 설령 그 맛이 안 난다고 해도, 각종 채소를 진하게 끓여 만든 ‘채개장’은 그 자체로 여름철 보양식으로 안성맞춤이다. 강보혜씨와 함께 팝업스토어(일정 기간만 운영하는 임시 매장)를 마친 음공 주인 이다빈씨는 “거대하지 않고 작지만 충분한,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거대한 것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작지만 충분한 것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강보혜씨는 동남아 음식인 쌀국수를 주메뉴로 팝업스토어를 연 적이 있다. 비건(vegan:엄격한 채식주의) 부리토를 만들어 ‘비건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것도 채식이 되네?’ ‘동물성 재료가 없는 음식도 생각보다 익숙하고 괜찮은 맛이 나네?’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3년 전부터 보혜씨는 여러 방식의 채식을 시도했다. 이따금 육류를 먹다가(플렉시테리언), 육류는 금하지만 생선까지는 먹고(페스코 베지테리언), 나아가 생선까지 거부하며 달걀과 유제품만 섭취하는(락토오보 베지테리언) 식이었다. 아무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갖는 식사 자리에서 메뉴를 제한하긴 쉽지 않았다. ‘채밍아웃(채식 선언)’을 한 이후엔 삼시 세끼를 감시당하는 느낌이었다.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까 봐 걱정하고, ‘유난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겁먹었다. 다만 그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 ‘내 돈으로 덩어리 고기만은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난 1월, 직장을 그만두고서 혼자 식사를 챙겨 먹으며 동물성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 ‘비건’을 지향하게 되었다.

비건은 채식을 지향할 뿐 아니라 동물에게서 나온 부산물도 쓰지 않는다. 동물권을 옹호한다. 가죽옷, 신발과 가죽 가방을 사지 않는다. 화장품을 살 때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브랜드를 고른다. 동물을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가능하면 일회용 컵을 쓰지 않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다.

동물성 식자재가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비건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마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타협점을 정해둔다. 멸치로 육수를 낸 국, 달걀과 버터가 들어간 빵, 굴소스가 들어간 요리 등을 먹기도 한다. 완벽하게 비건을 실천하려다 포기할 바에야 약간의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최근 비건을 지향하고 이를 밝힌 유명인이 여럿 나왔다.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는 연예계의 대표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배우 임수정은 완전 비건이다. 정혜윤 CBS 라디오 PD는 어릴 적부터 고기를 먹지 않으려던 ‘편식쟁이’였다며, 그 이유를 ‘고기가 한때 생명이었다는 생각에 슬퍼’졌기 때문이라고 썼다(〈아무튼, 메모〉).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책 〈두 번째 지구는 없다〉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채식 선택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 김한민씨의 〈아무튼, 비건〉을 읽고 채식을 시작한 이슬아 작가는 ‘탈육식’을 선언한다.

가축을 키우는 농가를 상상할 때 동물이 초원에서 풀 뜯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런 농장은 매우 드물다. 전 세계 가축 농장의 99%는 대규모 ‘축산 공장’이다. 육류의 대량생산을 위해,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수의 동물을 넣고 빨리 키워 도축한다. 이에 따른 밀집 사육, 항생제 남용, 가축을 향한 폭력과 학대 등이 오래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양계장과 돼지 축산 농장에서 일하고 쓴 르포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한승태 지음)에는 가축이 처한 현실이 기록돼 있다. 육계는 3∼4주면 도축된다. 알을 낳지 못하는 수평아리는 쓸모가 없어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대에 담겨 밟혀 죽는다. “공간의 감옥은 그대로인 반면 시간의 감옥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동물에게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주는 일은 충분한 공간을 보장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간 ‘고기’의 삶을 개선시키려던 노력은 대체로 실패했다.

영화 〈옥자〉의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돼지고기를 끊었다고 밝혔다. 주인공인 돼지 옥자는 도살장에 끌려간다. 이 장면을 위해 사전 답사한 미국의 한 도살장에서 피와 뼈, 살이 녹는 냄새에 압도되었다고 봉 감독은 말했다. 컨베이어벨트에는 피를 흘리는 돼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비건이 돼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지만, 동물을 공장에서 제품 생산하듯 파이프라인의 일부로 만든 것을 되짚어보는 영화”라고 〈옥자〉를 설명했다.

ⓒ시사IN 이명익채소 육개장인 채개장, 템페강된장쌈밥, 참나물참외샐러드, 고춧잎나물 등으로 구성된 채식 상차림.

채식 전환 후 힘이 세졌다

환경오염 또한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이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는 이유다. 소를 키우거나 가축 사료용 대두를 재배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훼손한다. 지난해 9월, 아마존 서북부 혼도니아 지역을 방문한 김한민 〈아무튼, 비건〉 작가는 “밀림이 아닌 골프장에 온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린피스 보고서에 따르면, 아마존 벌채의 80%는 육류 생산 때문에 벌어진다. 더구나 가축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동물법 및 정책 전문가인 헬렌 하워트 박사가 〈기후 정책〉(2018년 12월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메탄가스의 60%가 전 세계 사육용 양과 소의 트림과 방귀에서 나온다. 모든 교통수단의 배출량보다 많은 양이다. 지난 20년 동안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지구온난화에 85배나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지나친 육류 섭취가 비만과 성인병을 유발하고, 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는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나왔다. 2015년 10월,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베이컨·햄 등 가공육을 술·담배와 같은 1군 발암물질, 소·돼지·양 등 붉은 고기를 ‘발암 유발 효과’가 있다는 2A군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하지만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19년, 전 세계 육류 소비량이 2050년에 7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풀만 먹으면 단백질 결핍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더 게임 체인저스〉는 ‘고기를 먹어야 힘이 세진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채식으로 전환한 후 근육이 증가하고 회복력이 좋아졌으며 신기록을 경신한 사례가 숱하게 등장한다. 555㎏을 들어 올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스트롱맨’, 몸싸움을 벌이는 미식축구 팀, 배우이자 보디빌더인 아널드 슈워제네거, 미국 신기록을 세운 마라톤 선수·역도 선수 중 상당수로부터 ‘채식이 운동능력을 향상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국내에서는 롯데 자이언츠 투수 노경은 선수가 고기를 끊은 것을 시작으로 구단 내에 채식 바람이 불고 있다.

ⓒ연합뉴스2019년 8월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동물권 단체 회원들이 육식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공공급식의 채식 선택권

채식을 처음 시도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맛’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육고기의 맛은 너무 ‘익숙’하고 ‘맛있다’. 동물복지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건 지향이 옳다고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미각에서는 고기반찬의 유혹을 끊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요식업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비거니즘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다. 편의점의 한 MD는 “완전 비건 식품을 맛있게 만드는 게 목표다. 당장 성장세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대체육 상품을 잇달아 출시한다. 맛을 보완한 비건 식당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채식 인구는 10년 전에 비해 10배가량 늘어난 150만명으로 알려졌다. 채식 조리법을 담은 책 〈매일 한 끼 비건 집밥〉 〈채식하면 뭐 먹어?〉나 채식 식당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 ‘채식한끼’ 등이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다.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은 공공급식의 채식 선택권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군대 내에서 채식 식단을 허용하라는 내용의 진정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되었다. 4월에는 일부 청소년들이 ‘육류 위주’인 학교 급식이 자기결정권, 건강권, 양심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며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서울시교육청은 생태전환 교육의 일환으로 채식 선택권을 도입하기로 했다.

공공급식의 채식 선택권은 세계적인 추세다. 먹는 일도 교육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모든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에서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채식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채식을 기본으로 한 급식을 강화했고, 포르투갈은 공공급식에서 채식 옵션을 둬야 한다. 영국 고용법원에서는 흥미로운 판결이 나왔다. 2018년, 한 기업에서 동물실험과 연관된 일에 문제를 제기한 직원이 해고되었다. 그는 회사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다. 올해 1월, 판사는 “‘윤리적 비거니즘’이 의심할 여지 없는 철학적 신념에 해당하며, (비거니즘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면) 영국 평등법에 따라 차별금지 사유에 해당한다”라고 봤다.

한국의 정치권과 정부는 비건 트렌드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약한 편이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 정책을 발표하면서 ‘그린뉴딜 사업에 2022년까지 총 12조9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환경에 투자하면서 경기부양을 이끌어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정책은 찾아볼 수 없다.

신종 감염병, 이례적인 장마와 폭염, 꺼지지 않는 산불은 지구가 보내는 마지막 경고다. 동물을 ‘이용한’ 인간의 행위가 인류를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영화배우이자 동물해방 운동에 앞장선 크리스 드로즈의 일대기를 다룬 〈정면돌파〉를 번역한 전범선 책방 풀무질 대표는 “채식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대세다”라고 말했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함께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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