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제2차 전국의사 총파업 첫날인 8월26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 의료진이 벗어놓은 가운이 쌓여 있다.

의사 파업이 일단락됐다. 9월4일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파업을 풀고 진료에 복귀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은 추진을 중단하고 원점에서부터 재논의하기로 했다. 재논의 시점은 코로나19 안정화 이후로 미뤄졌다. 이른 시일 내에 의사 수를 늘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8월을 관통했던 갈등은 한국 사회에 분명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바로 ‘의사라는 자원을 배분하는 법’에 대한 질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료는 매우 예외적인 영역이다. 이번 갈등을 촉발시켰던 방아쇠는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발표였다. 그런데 왜 국립대뿐만 아니라 사립대까지 포함한 의과대학 정원을 정부에서 결정하려는 것일까?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의사를 찾는 사람도 많은데 왜 지난 20년간 의대 정원은 매년 동일하게 3058명으로 묶여 있어야 했는가?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가마다 의료시스템은 판이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대 정원만은 공통적으로 정부가 관리한다. 의료시스템이 자유롭다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의료라는 부문은, 자유로운 수요-공급에 따라 조정된다는 시장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명색이 민주공화국 체제인데 돈 많은 사람만 치료받고 돈 없으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치료받을 권리’가 현실에서 문자 그대로 온전히 보장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치료비를 낼 수 있는 능력(구매력)’을 가진 시민만이 ‘치료받을 권리’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 느슨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공공성을 떼어놓고 의료시스템을 설계할 수 없는 이유다.

더욱이 ‘의료서비스(진료)’라는 ‘상품’을 수요-공급의 자연스러운 변동(시장)에만 맡길 경우, ‘공정한’ 거래가 도리어 불가능하게 된다. 의료서비스란 것 자체가 매우 특이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쌀·감자·스마트폰 같은 재화나 이발 같은 서비스를 구입하는 경우, 그는 자신이 사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정보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비교적 공정한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스마트폰을 사는 상황을 예로 들면, 이 상품으로 통화나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아는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산다. 그러나 이상이 제주대 의대 의료관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의료서비스는 그렇지 않다. 아픈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의료서비스(치료 방법, 수술, 입원 등)를 구입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소비자인 환자는 자신이 사야 하는 의료서비스의 내용·품질·가격에 대해 의사보다 훨씬 적은 정보를 갖고 있다.” 이른바 ‘의료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이다.

이로 인해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한 진료보다 더 많은 진료를 해서(과잉 진료) 돈을 벌 수 있다. 환자가 모르기 때문이다. 수준 미달의 의사도 의료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그래도 환자는 모른다.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의대 정원을 규율하고, 시험을 통해 의사 면허를 발급한다. 국가 면허를 받는 사람(의사)만이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 국가가 의사 수를 조절하며 그들만이 ‘의료서비스 공급’을 독점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 같은 국가적 보호 덕분에 의사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경제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연합뉴스8월7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대한전공의협의회 학생들이 의사 정원 확대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 국가의 정부들에게 의료는 굉장히 독특하고 고민스러운 의제로 자리 잡게 된다. 의료 수요를 세심하게 포착하고 의사 공급을 조정하는 까다로운 역할이 정부에 주어진 것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정부가 의료 부문에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로 ‘적정한 자원 공급’을 꼽았다.

“의료 자원 공급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절대적인 양을 얼마나 공급할 것인가’이다. 두 번째는 ‘그 자원을 수요에 맞춰서 지리적으로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는가’이다. 의료 수요와 공급을 조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여러 가지 정책을 사용한다.”

한국에 의사가 부족한지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는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양측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지방에 의사가 부족하다’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진료 과목에 의사가 부족하다.’ 정부는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지방과 필수진료 과목으로 ‘흘러넘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에 모아놓은 담수가 너무 적다면 필요한 모든 논밭으로 흘러가지는 못할 것이다. 통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의 의사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적은 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부의 진단이 옳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처방은 ‘의대 정원 확대’일 수밖에 없다. 다만 미래의 의료 수요를 아주 정밀하게 예측하기는 어려우니, 한 해에 400명씩 10년 동안 4000명의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한 것이다. 2000년의 의약분업을 계기로 당시 한 해 3273명이던 의대 정원이 3058명으로 200명 줄어든 바 있다. 이후에는 그 수준으로 고정되었다. 더욱이 약 12만명인 국내 의사 수를 감안하면, 10년간 4000명의 의료서비스 공급자(의사)를 늘리는 정책이 아주 급진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공공의대 신설이 뜨거운 쟁점으로 타올랐지만, 공공의대의 정원인 49명은 폐교된 서남의대 정원(49명)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저수지 키우기’라면 ‘지역의사제’는 ‘용수가 닿지 않던 논밭으로 물길을 내는’ 방안이다. 의료 수요에 비해 의료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지방에 의료서비스 공급을 늘리는 정책. ‘지역의사제’에 따르면 지역의사로 선발된 300명은 10년간 해당 지역에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전공을 선택할 때도 해당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필수진료 과목으로 범위가 제한된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의사들이 계속 지방에 남을 수 있도록 지역 의료 인프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계획도 정부안에 포함돼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방의 의사 수급난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다음 세 가지를 권고한 바 있다. ‘지역 출신을 뽑는다’ ‘지역에 근무하는 조건으로 뽑는다’ ‘지역에서 수련받게 한다’. 정부가 제안한 지역의사제가 세상에 없는 터무니없는 방식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하는 의사들도 정부 방안만으로 지방과 필수진료 과목에 의사를 공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한국 의료계는 서울과 일부 인기 과목으로 의사가 몰릴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지방에 머무는 의사를 잠시 힘들게 늘려놓더라도 그 효과가 지속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방 근무를 강제하는 것 이상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먼저 한국 의료계의 뒤틀린 지형도를 살펴야 한다.

■ 한국 의료의 기울어진 세 기둥

문정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는 의사 출신의 공공의료 연구자다. 그는 한 나라의 의료제도를 ‘의료비용 조달 체계’ ‘의료 공급 체계’ ‘의료 인력 양성 체계’라는 세 부분으로 나눠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국은 세 기둥 중에서 의료비용 조달 체계에서만 공공성이 확보된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한국 의료시스템을 떠올려보자. 의료비용 조달의 기본 골격은 국민건강보험(건보)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전 국민에게 일괄적으로 보험료를 걷는다. 그 보험료를 바탕으로 조성된 자금으로 병원에 진료비 일부를 환자 대신 지불한다. 환자가 병원에 직접 내는 ‘본인부담금’이 있지만 건보가 적용되는 진료라면 보험금 비중(건보 보장률 63.8%)이 더 높다. 건보에서 의료비를 지급할 때 병원이 달라는 만큼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기본적으로 ‘행위별 수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의료 행위별로 가격(의료수가)을 정해놓고 그 가격대로 보험급여를 병원에 지불하는 것이다. 2019년 기준으로 모두 7519개 의료서비스에 대해 수가가 매겨져 있다. 의료수가는 일종의 가격통제다. 의사나 병원이 마음대로 진료비를 책정할 수 없다. 정부는 수가를 통해 의료비를 적정 수준으로 통제한다.

반면 나머지 두 축인 ‘의료 공급 체계’와 ‘의료 인력 양성 체계’는 거의 전적으로 민간에 맡겨져 있다. 한국에서 대다수의 병원은 민간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학비도 의대에 대한 정부의 별도 지원 없이 의대생이 마련한다. 한국인의 눈엔 당연한 현상이지만 국제적 기준으로 따지면, 꽤 독특한 구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유럽 선진국들의 경우 전체 병상 중 70~100%가 공공병원에 있다. 민간 의료기관도 존재하지만, 동네 의원이 아닌 입원 환자를 받는 ‘병원급 의료기관’은 전통적으로 공공부문에서 제공해왔다. 한국은 민간에서 만들어진 의료기관 비율이 의원급에서는 95%, 병원급의 경우에도 90%에 이른다.

공공이 절대선이고 민간은 축소해야 할 대상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문제는 의료기관의 공급을 대부분 민간에서 담당하므로 정부가 ‘의료전달체계’를 적절하게 관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의료시스템은 흔히 피라미드 구조에 비견된다. 의원급의 1차 의료기관에서 경증 환자를 보고, 2차 의료기관(종합병원)에선 입원 및 전문과목 진료가 필요한 환자를 치료한다. 면역저하나 장기 이식처럼 난이도가 높은 수술 및 처치가 필요한 환자들은 3차 의료기관인 상급 종합병원으로 간다.

비교적 위험이 덜한 환자는 낮은 단계의 병원에서 치료받고 질병이 심각할수록 높은 단계의 의료기관으로 가는 구조다. 의료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도 막을 수 있다. 대학병원에서 감기 환자를 치료하고, 동네 의원에서 값비싼 검사장비를 들여놓는 지금의 한국 의료계 상황은 분명히 비효율적이다. 동시에 필수 의료이지만 수익성이 낮은 과목들에서는 공백이 발생한다. 문 상임감사는 “중증외상센터라든가 응급, 중환자 치료, 수술을 많이 하는 과목들은 이윤을 내기 어렵다. 상업화된 민간병원이랑 잘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공의료기관은 얼마 안 되고 역량도 낮아 그 공백을 채울 수 없다.

결국 국민건강보험이 위태롭게 공공성을 담보하는 가운데 서울의 큰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고, 수익성이 높은 과목으로 의사가 쏠리는 것이 한국 의료계의 현실이다. 환자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원하는 만큼 의사를 만날 수 있지만 그때마다 3분 진료에 만족해야 한다. 한국의 의료접근성은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료 가능한 사망률(의사에게 치료받았으면 생존했을 환자가 치료받지 못해 사망한 경우)’은 한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최대 3배를 웃돌 정도로 격차가 심하다(서울시 강남구 29.6, 경북 영양군 107.8).

그러나 의료제도를 백지부터 다시 쌓아 올릴 수는 없다. 한국 의료시스템은 고유의 맥락을 통해 형성되었고 순기능도 적지 않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인정하면서, 기울어진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정과 모색이 필요할까.

■ 저수가는 만악의 근원?

건보 수가가 의료계에서 통용되는 가격이라면 가격 조정을 통해 일명 ‘기피 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의료계에서는 오랫동안 필수진료 과목인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와 흉부외과에 지원율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잘못된 수가 정책을 꼽아왔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적인 분야의 수가가 너무 낮아서, 비급여 진료가 많은 성형외과·피부과·안과 등으로 의사가 쏠린다는 것이다. 비급여는 건강보험 급여에 반대되는 말로 건보가 보장하는 의료 행위가 아니라 병원에서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의협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전문가들도 한국의 건보 수가가 낮은 편이란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상이 교수는 “어떤 의료 항목들의 수가는 미국이나 유럽 주요국에 비해 30% 수준에 머문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형병원은 의료 행위보다 장례식장, 주차장, 식당 등 부대시설로 수익을 내고, 의원은 3분 진료를 하며 환자를 많이 치료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가가 낮지만 한국 의사들이 비교적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배경이다.

23쪽 그림은 연세대 산학협력단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의뢰를 받아 일산병원의 건강보험 급여 대비 원가보전율을 산출한 것이다(일산병원은 건보 공단에서 직영으로 운영한다). 원가보전율을 계산하는 방식(ABC·RBRVS)에 따라 수치는 조금 다르지만 진료 영역별로 큰 편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검사료, 영상진단 및 방사선 치료료, 이학요법료, 정신요법료는 원가 이상을 돌려받는 반면 처치 및 수술료, 진찰료, 입원료 등은 원가를 밑돌았다. ‘수술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난다’는 의료계의 오랜 통설이 실증 데이터에서도 드러난다.

건보 수가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안이 함께 굴러가야 한다. 하나는 전반적인 저수가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료율을 매년 올리고 있다. 다른 하나로는, 과목 간 불균등하게 배정돼 있는 급여 체계를 교정해야 한다. 다만 과목 간 수가 조정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사안이다. 건보 재정을 커다란 파이에 비유한다면, 진료 과목별로 그 과목의 상대 가치를 따져 파이를 나눠 가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 과목의 수가가 상대적으로 커지면 다른 과목의 수가는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인기 없는 과목의 수가를 높이려면 현재 인기 있는 과목의 수가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26개 전공별 학회장이 합의해야 수가를 조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필요성은 제기되었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합의다.

ⓒ연합뉴스9월4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최대집 대한의사협회장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정 협의체 구성 합의서 체결식에서 합의서에 서명한 후 교환하고 있다.

더욱이 역대 정부들이 기피 과의 수가를 올리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피 과의 의사 공급을 늘리지는 못했다. 실제로 2009년부터 전공의 지원율이 저조한 흉부외과와 외과에 대해 ‘수가 가산제’가 시행되고 있다. 흉부외과의 201개 처치 및 수술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수가의 100%를, 외과에서 하는 322개 의료 행위에는 30%를 수가에 가산해 지급한다. 그러나 흉부외과나 외과의 전공의 모집 상황은 10년째 별반 나아지지 않고 있다. 사실 금전적인 보상을 높이는 방식이 의사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지방에는 의사가 부족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의사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지방의 의사 소득은 수도권을 추월한 지 오래다.

비공개로 인터뷰에 응한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직도 많고, 응급 콜도 있고, 의료사고 위험까지 부담해야 하는 과목들이 있다. 흉부외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 중에 분만 파트 같은 곳이다. 이런 과들의 수가 개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금전적 인센티브만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전공에서 감수해야 하는 수고와 위험부담을 돈으로 바꾼다면 엄청나게 높을 거다. 국민건강보험 체계에서 감당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병원이 리스크를 책임져줄 수 있는지, 적정한 수의 동료와 보조인력, 장비가 갖춰져 있는지 등을 물어야 한다.”

의협에서도 수가 인상만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성종호 의협 정책이사는 “돈도 중요하지만 의사가 느끼는 보람도 중요하다. ‘외과를 꼭 하고 싶어’라고 할 때 돈 많이 벌겠다고 가는 건 아니다. 흉부외과 지원자들은 심장 수술같이 드라마틱한 걸 하고 싶어서 가는 사람들인데 졸업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는 의사를 구하지 못해 난리인데 갈 곳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수가를 100% 인상해도 흉부외과 일자리는 왜 늘어나지 않을까. 단순히 수가를 통한 가격 조정만으로는 의사라는 자원의 최적화된 배분을 기대하기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 의료라는 생태계를 가꿔라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의사들은 하나같이 “의료는 전달체계”라고 말한다. 임승관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장은 의료전달체계를 의료 생태계에 비유했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의료 생태계는 어떤 모습일까. “1차와 3차 사이에 낀 2차 의료기관급 종합병원의 역할이 너무 없다. 허리가 무너져 있는 셈이다.” 우선 1차 의료기관인 개원의의 진료 과목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있다. 내과·정형외과·이비인후과·신경외과·비뇨기과 등등. 환자는 머리가 아플 때, 열이 날 때, 코가 막힐 때, 소변을 보기 어려울 때 증상에 맞는 전문 과목을 본인이 알아서 찾아간다.

1차 의료기관에서 포괄적인 진료를 하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때 2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으로 환자를 올려 보내는 역할 분담이 되지 않는다. 입원해야 할 정도의 질환이면 바로 3차인 대학병원으로 넘어가버린다. 2차 종합병원에서 담당해야 할 영역이 1차와 3차 의료기관에 침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2차 병원 가운데 그나마 수익을 내는 곳은 척추나 관절, 재활 등을 내걸고 공장처럼 수술방을 돌리는 전문병원들이다.

문제는 2차 종합병원이 없으면 의료계에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1차와 3차 의료기관이 비대한 의료 생태계에서 의대생들의 전공 선택은 개업을 할 수 있는 과목으로 쏠리게 된다. 개원을 못하는 과목의 경우, 선호할 만한 미래는 대학병원에 남아 교수가 되는 것뿐인데 이는 몹시 좁은 길이다. 정형외과·신경외과도 흉부외과처럼 전공의 수련 환경이 혹독하고,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과목이지만 지원율은 높은 편이다. 두 과목 모두 개원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구조라면 호흡기내과, 감염내과,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중환자 의료처럼 개업은 어렵지만 필수적인 과목은 만성 인력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말도, ‘그 과목을 전공하면 갈 곳이 없다’는 말도 모두 맞는 소리다.

ⓒ시사IN 신선영2019년 8월23일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이 아침 회진을 도는 모습.

그런데 지금의 의료 생태계에서는 2차 종합병원이 자생적으로 수익을 올리며 살아남을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1차와 3차 의료기관이 종합병원으로 갈 수요를 대부분 가져가는 상황에서 2차 의료기관은 생존능력이 없다. 임승관 원장은 시장에서 자생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2차 의료기관 역할을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500병상에서 600병상 정도 규모의 종합병원이어야 병원 내에서 완결된 진료를 해낼 수 있다. 공공병원 중에 서울 보라매병원이나 서울의료원이 그런 곳이다. 그 정도가 되면 척추 수술도 하고 아주 까다롭지 않은 위암이나 유방암 같은 수술도 할 수 있다. 감염내과·호흡기내과·흉부외과 의사들도 필요해진다. 지금은 감염내과 면허를 가진 사람들이 대학병원 아니면 갈 곳이 없다.”

현재 지방의료원의 규모는 대부분 200~300병상 남짓 되는 애매한 규모다. 이런 소규모 의료원을 난립시키기보다는 500~600병상 규모의 튼튼한 지방의료원을 만들어야 한다. 이 지방의료원들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2차 종합병원 구실을 할 수 있다면 지역 간 의료 격차도 한층 좁혀질 것이다. 의료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 지역의 거점이 되는 대학병원과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보건의료는 독특한 영역이다. 정부는 의료 자원의 공급과 배분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정부가 나아가는 방향이란 곧 시민들의 의지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의료는 꽤 잘하고 있다. 이대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의 변화와 깊어지는 지역 간 의료 격차를 고려해 고민스러운 과제를 받아들 수도 있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의정 협의체 테이블에 의대 정원 확대라는 의제가 다시 올라올 때에는 그 답이 나와야 한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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