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전공의 제공8월23일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대 재논의 등을 촉구하며 의사 가운을 벗고 있다.

“이 가뭄에 웬 파업?” “월드컵 앞두고 웬 파업?” “지진에 웬 파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보수언론들이 뽑아내는 기사 제목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가 파업해도 괜찮은 날을 찾기란 ‘손 없는 날’로 이삿날 정하기보다 백배 더 힘들다. 날씨와 자연재해, 국제 행사 등을 고려해야 한다. 경제가 호황이면 찬물을 끼얹을까 봐, 불황일 때는 경기를 악화시킬까 봐 조심해야 한다. 헌법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명시되어 있지만, 아무리 ‘합법적’ 파업을 해도 “시민의 발을 볼모로” 따위의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 사용자 측의 회유와 협박, 폭력적 진압, 손해배상 가압류 조치도 드물지 않다. 파업으로도 안 되면 노동자들은 고공 철탑에 올라가고 단식, 삼보일배를 한다. 그렇게 해도 기업주나 책임 있는 관료, 유력한 정치인이 나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파업’이다.

그러니 “코로나 시국에 웬 의사 파업?”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의 파업에 해당하는지 따져 묻지 않겠다. 진료 거부든 파업이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행동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병원 경영진이 파업 참가자들을 두둔하고,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여당과 야당의 대표들을 만나고, 담당 부처의 관료들은 물론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대화에 노력하는 모습에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렇게 다들 따뜻한 분들이었나?

더욱이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정책 추진을 일단 중단하겠다’고, ‘의사들이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수차례 해명과 근거자료를 제시했지만, 파업 당사자들은 요지부동이다. 단호한 투쟁 의지가 진심인 것은 이제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대체 왜 그렇게 단호한 것인지는 그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 그들의 단체행동 때문에 당장 나와 가족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다. 의사들에게 감정이입하여 그 처지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다면, 일반 시민들에겐 너무 가혹한 요구다.

나만 몰랐던 의사와 의대생의 ‘도원결의’

이번 파업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투쟁에 참여한 이들의 엄청난 동류의식이다. 병원의 경영진, 의과대학 교수, 전임의, 전공의와 수련의, 학생들, 개업 의사, 봉직의 등의 이해관계는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 움직인다. 학창 시절 우리 단과대학 구호가 ‘단결의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어찌나 단결이 안 되는지 제발 단결 좀 해보자는 열망이 담긴 구호였는데 말이다.

코로나 진료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의대생마저 “덕분에” 따위로 의사를 희롱하지 말라며 캠페인을 벌이고 국가고시 거부 및 동맹휴학이라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교수들은 근무지를 이탈한 ‘우리 후배들’을 감쌌고, 동맹휴학을 선언한 ‘우리 제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생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의과대학에 잠깐 교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약대가 6년제로 전환되는 것에 반대하여 전국 의대생들이 동맹휴업을 벌인 적이 있다. 당장 이틀 뒤에 내가 맡은 과목의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학생 대표가 찾아와 시험 연기를 요청해왔다. ‘약대가 6년제 되는 것이 의대생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투쟁을 하느냐’고 물었다. “약사들이 지금도 의사 행세를 하는데 6년제가 되면 불법 진료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학생총회를 거쳐 결정한 사항이라니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시, ‘투쟁’이라면 시험을 ‘거부’해야지 ‘연기’해달라는 건 좀 이상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다른 과목 교수들은 다 미뤄주기로 했다면서 덧붙인다. “교수님도 의사시잖아요.” “엉?”

의사와 의대생 13만명이 나만 빼놓고 모여서 도원결의라도 맺었단 말인가? 아니면 의대 입학식 날 팔뚝 안쪽에 ‘의사!’ 인장 찍어준 것을 내가 놓치기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의료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빼놓고는 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료 자유주의(medical liberalism)는 환자의 자유로운 의사 선택을 보장하고, 의사의 개별적인 임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념이다. 이에 따르면 보건의료는 여타의 상품·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제공되며, 의사들은 제약 없이 스스로 진료비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로 개원의들에 의해 의료서비스 제공이 이루어졌던 19세기 유럽과 북미에서 형성된 의료 자유주의는 20세기를 지나며 도전을 맞는다. 보건의료가 상품이 아니라 ‘공공선(public good)’이며 시민의 권리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집합적으로 재원을 조달하고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서구 복지국가의 황금기라 일컬어진 1960년대 유럽과 북미에서, 의료보장 확대나 보건의료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이 수차례 일어났다. 면허 관리, 전문가적 표준에 미달하는 구성원 제재 등에 주력했던 ‘전문가 자율기구’ 성격의 의사 단체들이 노동조합 같은 형태로 조직을 바꾼 것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충돌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62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서 일어난 건강보장 확대와 이에 맞선 의사들의 파업일 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건강보장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대초원 지역 중 하나인 중부 내륙의 서스캐처원주는 경제발전이 뒤지고 드넓은 농촌지역에 인구도 적었다. 시장을 통한 의료서비스 제공이 원활치 않아, 주민들은 의료 이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서스캐처원은 북미 대륙을 통틀어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처음으로 집권(1944년)한 지역이 된다. 캐나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보편적 건강보장 제도 ‘메디케어(Medicare)’가 태동한 곳이다.

1944년 주지사로 당선된 토미 더글러스는 1947년 서스캐처원에 보편적 병원보험을 도입했다. 당시 캐나다 병원들은 대부분 비영리 종교단체 소속으로 대다수가 재정 문제를 겪고 있었다. 안정적인 정부지원금이 절실했다. 의사들도 심각한 진료비 체납 문제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던지라 공공보험 도입에 우호적이었다.

서스캐처원에서 병원보험이 성공하면서 다른 주들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다. 연방정부가 움직이면서 1957년에는 ‘전 국민 병원보험법’이 통과되었다. 오늘날 ‘메디케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미 더글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외래 진료비까지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건강보험제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의사 집단의 협력을 받기 위해 1960년 4월, 주 의사협회 대표자들을 포함하는 ‘메디케어 자문기획위원회(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합의안을 도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950년대를 경과하면서 메디케어에 대한 의사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주 의사협회는 자문위원회 내부에서 지연 전략을 구사하며 ‘정부의 직접적 보험 제공’이 아니라 ‘민간보험에 보조금 지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협회는 1960년 주의회 선거에서 ‘메디케어 확대 저지’를 슬로건으로 총력전을 벌였다. 서스캐처원은 말 그대로 ‘북미 대륙 전체의 전쟁터’가 되었다. 주 의사협회는 메디케어 확대 저지 운동을 위해 의사 1인당 100달러의 후원금을 걷었다. 캐나다 의사협회의 후원도 받았다. ‘사회주의 의료’가 미국으로 전파될 것을 우려한 미국 의사협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1960년에 지출한 저지운동 자금 9만5000달러는 당시 메디케어를 추진하던 캐나다 여당(CCF)과 야당 자유당의 선거자금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Gatty Images1962년 7월11일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서 메디케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의료 자유주의와 시민적 권리의 충돌

캐나다 의사들은 건강보장 제도 도입을 오랫동안 저지해온 미국 의사협회의 노하우도 전수받았다. 신망받는 의사들을 키맨(key man)으로 두고 10명 단위로 소모임을 관리하며 이탈자를 방지했다. 의사와 시민들에게 배포할 홍보물과 키트도 제작했는데, 핵심은 메디케어가 ‘의료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홍보물에는, 메디케어가 확대되면 주민들의 의사 선택권이 박탈당하고, 정부가 강제로 낙태수술을 하며, 의사들이 모두 서스캐처원을 떠나 실력 없는 의사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런 노력을 했는데도 1960년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주의자들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정부는 이 결과를 ‘주민들의 메디케어 지지’로 해석하며, 정책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의사 측은 자신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주정부는 제한된 조건에서 의사들이 주도하는 민간 의료보험을 허용하고, 메디케어 바깥에서 환자에게 직접 청구하는 것도 허용하겠다는 양보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정부 양보안이 법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거부하며 자신들의 최종안을 제시했다. 정부가 민간보험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의사들은 모든 환자들에게 직접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면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1962년 5월, 주의 전체 의사 900명 중 약 600명이 참여한 긴급총회 이후 의사들은 실제로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다. 메디케어 확대를 지지하는 노동조합과 교회, 시민사회 단체도 많았다. 그러나 주지사는 사회적 갈등 격화를 피하기 위해 맞불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사협회는 이런 상황을 두고, ‘반대 세력이 미미하다’라고 오판했다. 의료보험법이 발효되는 7월1일, 의사들은 전면 파업에 나섰다. 응급 서비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서스캐처원 지역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외 언론들은 의사들의 결정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보건의료 개혁 조치에 반대할 권리가 의사들에게 없으며, 파업에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메디케어 확대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의사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의학 학술지 〈랜싯〉마저도 의사협회가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비판 논설을 냈다. 주정부는 계속 협상과 양보 의사를 밝혔지만 의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키백과캐나다 정치인 토미 더글러스는 ‘메디케어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러나 7월11일 의사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대중 집회가 실패로 끝나고, 의사들이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파업 동력을 상실해갔다. 주정부는 영국 국립보건서비스 설립에 관여했던 의사이자 노동당 정부 각료였던 스티븐 테일러 경을 초빙하여 중재를 맡겼다. 의사들의 신망이 높았던 테일러 경의 중재가 성공하면서 7월23일에 ‘사스카툰 협정’이 체결되었다. 23일 만에 파업이 종결된 것이다. 의사들은 메디케어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데 합의했다. 그 대신, 정부는 의사들이 주장해왔던 선택권, 즉 의사들이 메디케어 바깥에서도 진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행위별 수가제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58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던 일이지만, 어느 한 장면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면 독자의 기분 탓만은 아니다.

‘의료 자유주의’가 모든 사회에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노르딕 국가들에서는 의료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독립적 자영업자 의사와 환자 개인’의 시장적 거래관계가 처음부터 분명치 않았다. 이를테면 덴마크에서는 1857년에 의사협회가 결성되었는데, 당시 이들은 진료비 상환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질병기금’, 말하자면 건강보험조합을 구축하는 것에 활동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덴마크 의사들은 장인조합(길드)이 회원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방식의 ‘조직화된’ 의료시장에 익숙했고, 1986년 장인조합이 해체되자 조직된 소비자의 대안을 찾고자 노력했다. 의사들은 지역에서 질병기금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특히 농촌 지역에서 그러한 노력이 두드러졌다. 정부 개입이 별로 없어도 ‘집합적 자발성(collective voluntarism)’에 따라 보건의료 체계를 조직한 것이다.

의료 자유주의는 지나간 시대의 이념이며, 심지어 역사적으로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회권 확대와 복지국가의 성장은 모두를 보건의료의 이해 당사자로 만들었다. 의사들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의사 개인은 공공재가 아니다. 그러나 보건의료는 분명히 공공재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 통제는 불가피하다. 의료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면허의 독점 또한 국가가 보장해주기에 가능하다. 의사 면허는 고귀한 혈통의 신분증이 아니라 사회와의 계약서다.

사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의사 증원 방식, 지역의사제, 공공의대 설립 방안의 불충분함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와 시민사회에서 일찌감치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이런 중요한 문제의 당사자는 의사만이 아니기에, 다른 보건의료 종사자들, 전문가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어야 했다. 의사들이 말하는 대로 더 나은 보건의료, 공공성 강화를 원한다면 정부와 싸우더라도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싸웠어야 했다. 그런데 의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건의료 종사자의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은 시민들에게도 편익으로 돌아온다. 2013년 ‘보건의료 부문의 근로시간 형태와 그 영향’이라는 연구에 참여했던 대형병원 전공의들은 인터뷰 중에도 계속 휴대전화 알람을 확인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달의 수명을 깎아 먹는 것 같은 당직을 서고 그다음 날 일을 하다 보면 판단이 느려져요. 판단이 늦고 좀 멍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뭔가 내 동작이 느리다는 것을 본인이 느껴요.” “항암제의 종류랑 양이랑 체중이랑 다 계산해서 넣어야 되는데 피곤하면 틀릴 수밖에 없거든요. 간호사들이 체크를 해서 다시 알려주거나 양이 잘못 들어가는 경우도 꽤 있고.”

주당 80시간이라는 살인적 근무시간을 줄이고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전공의들은 물론 환자와 그 가족, 다른 보건의료 종사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연봉 2억원을 받는다고 비난받지만, 사회적·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하고 시설 장비와 지원 인력, ‘생태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방도시 병원에서 의사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렇기에 ‘지역의사 양성으로 어떻게 지역 불평등을 완화할 것인지’는, 보건의료 체계 내부는 물론 의료 체계 바깥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시야로 논의되어야 한다.

ⓒ연합뉴스정세균 국무총리(맨 오른쪽)가 8월24일 대한의사협회 회장단과 면담하고 있다.

보건의료인-시민 연대가 필요하다

의사들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캐나다 서스캐처원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메디케어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소수의 의사들은 힘을 합쳐 지역사회 클리닉을 열고 환자들에게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는 오늘날 캐나다에서 취약계층에 1차 의료 중심의 통합적 보건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건강센터로 발전했다. 이곳의 의사들은 혼자가 아니라 간호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등으로 구성된 팀과 함께 일한다. 센터에 소속된 의사들의 급여는 일반 개원의와 비슷하다. 혼자 일하며 한정된 서비스만 제공 가능한 개인 클리닉에 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취감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래서 젊은 의사를 구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지역사회의 필요와 의료 전문가들의 개인적 성취, 보상을 조화시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캐나다 의사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필립 버거 박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메디케어와 공공보건의료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2012년에는 ‘난민 돌봄을 위한 캐나다 의사 모임’을 설립하고, 난민 보건의료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전국 의사 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활동이 어떻게 가능했냐는 질문에 조금은 낯선 답변이 돌아왔다. “캐나다 병원은 공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개별 의사들에게 수익 압박을 가하지 않고, 의사들도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보건의료 체계의 공공성이야말로, 보건의료 전문가에게 (엄청난 고소득은 아니겠지만) 경제적 안정과 전문가적 자율성,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지 않을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독점적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면 책무성이라는 사회계약에 더 충실해야 한다. 스스로를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한다면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과 연대의 마음으로 ‘함께’ 보건의료 개혁에 나서야 한다. 도원결의에 미처 참석하지 못했던 의사가 아니라, 환자 가족을 둔 시민으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기자명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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