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구경제 미디어 ‘어피티’. 사회 초년생이 꼭 알아야 할 경제 기사와 재테크 정보를 뉴스레터 형태로 제공한다.

가격표에 적힌 5만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삼성(주식) 한 주 값인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1년 차 직장인 황지은씨(27·가명)는 주식시장에 발을 들인 지 6개월 된 ‘개미’다. 매월 20만원씩 적금 붓는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은행 예금만으로는 목돈 마련이 어려운 시대잖아요.” 이공계열 출신인 그에게 주식은 먼 얘기였다. 처음 경제 기사를 읽기 시작했을 때 조사 외엔 이해한 문장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황씨가 이제는 전자공시시스템(DART)에서 투자할 기업의 재무제표를 확인한다. 통장도 CMA 계좌와 적금 계좌 등 7개나 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게 보여요.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요.” 돈 모으는 재미를 알게 된 황씨의 말이다.

강가람씨(30)도 최근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 2013년부터 돈을 벌었지만 금융 경제는 늘 ‘내 일’ 같지 않았다. 월급은 그저 고고하게 버는 것이었고 돈에 매달리는 것은 속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강씨가 푼돈에 ‘집착’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내가 나를 부양하기 위해서요. 내 문제인데도 너무 방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안 쓰는 기프티콘을 모바일 거래장터 앱으로 팔아 용돈을 챙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설문조사나 퀴즈 풀기로 포인트를 적립하기도 한다. ‘짠테크(짠돌이+재테크)’를 습관화한 것이다. 2금융권 은행에 3.8% 고금리 적금 상품이 떴을 땐 반차를 내고 다녀왔다. 지난해에 선납이연(적금 상품을 예금처럼 굴려 더 높은 이자를 얻는 기법)으로 쏠쏠한 부수입을 얻었다며 강씨는 기뻐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소비가 아니라 저축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의 일상을 바꾼 건 2030 여성을 타깃으로 한 금융·경제 콘텐츠들이었다. 황씨와 강씨는 유튜브 채널 ‘듣똑라(듣다 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와 경제 미디어 ‘어피티’(Uppity:거만한, 건방진. 자산관리에서 여성들이 좀 더 자신감을 갖자는 취지로 작명)를 알게 되고 돈 얘기를 시작하게 됐다. 〈중앙일보〉 기자 네 명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듣똑라’는 최근 경제 콘텐츠 ‘워니(WONEY, Woman+Money)’를 기획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사회 초년생의 월급 관리, 목돈, 내 집 마련을 위한 재테크 정보를 낯설지 않은 용어로 설명한다. “청약통장은 아파트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다” “1억원이라는 시드머니가 있으면 13번째 월급을 만들 수 있다” “첫 월급을 받으면 먼저 통장 4개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출연자의 말이 명언으로 남았다. 댓글 사이로 ‘20대 때 이걸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가뭄에 단비 같은 채널’이라는 응원이 교차하는 까닭이다. 개설 4개월 만에 구독자 18만명이 모였다. 돈 많은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라는 제목의 15분짜리 첫 영상은 6월11일 기준 조회 수 70만 회를 기록했다.

ⓒ듣똑라 유튜브 갈무리〈중앙일보〉 기자들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듣똑라’. 사회 초년생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경제 미디어 ‘어피티’도 성장의 궤를 같이한다. 2018년 4월 시작된 어피티는 사회 초년생이 꼭 알아야 할 경제 기사와 재테크 정보를 뉴스레터(‘머니레터’) 형태로 제공한다. 적금 만기까지 모았는데 막상 통장을 열어보니 이자가 생각보다 적을 때, 살던 집 주인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연봉 협상을 앞두었을 때 등 사회 초년생이 흔히 겪을 수 있는 ‘돈 문제’ 앞에 당황하거나 주눅 들지 말자고 머니레터는 말한다. 6월15일, 어피티는 창업 2년 만에 구독자 7만명을 돌파했다. 2019년 초 60~70%이던 여성 구독자 비율도 현재 87%로 늘었다. 그중 25~34세가 85%를 차지한다. 어피티 박진영 대표는 “최근 들어 대학생과 프리랜서들이 유입되면서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어피티는 황씨와 강씨가 정기적으로 보는 유일한 뉴스 채널이기도 하다.

“왜 금융 경제나 주식을 언급할 때 상상되는 주체는 드라마 〈미생〉에 나올 법한 하늘색 셔츠를 입은 남성들일까요?” 박진영 대표가 처음부터 여성을 타깃으로 한 경제 미디어를 구상하게 된 질문이었다. 돈 얘기를 할 ‘공간’이 여성들에게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동학개미운동’에 40대 여성이 대규모 유입되었다는 기사에 “남편이 하라고 해서 계좌 만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엄마들이 주식 이야기를 하던데 이제 슬슬 팔 타이밍” 같은 댓글이 달린다. ‘복부인’이라는 오래된 표현에서처럼 여성의 투자 활동이 폄하돼온 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여성의 경제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10년 뒤에도 ‘잘 버는’ 모습을 꿈꾸는 동료 여성을 찾기가 어려운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잘 몰라서, 어려워서, 투자는 위험한 것이라 들어서.’ 경제활동을 하는 많은 여성들로부터 재테크가 멀어지게 된 이유들이었다. 황지은씨는 최근에야 비로소 ‘사회가 여성들에게 돈을 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직장에서도 주식이나 내 집 마련에 관한 대화가 단골 소재이지만 대부분 남자 상사 위주라 공감대를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1인 여성 가구로 살며 드는 현실적인 고민을 나눌 동료가 부재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박진영 대표도 비슷한 부분을 지적했다. “여성들이 돈과 관련된 고민이 있다 해도 꺼내기 어려운 상황들이 존재한다. 당장 버는 것보다 돈을 컨트롤하려면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데 감을 익힐 기회가 그만큼 부족해진다.” 2017년 금융감독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 2922건 중 74%가 2030대 여성이었다. “돈을 불리는 것만큼, 돈을 잃지 않는 법도 중요하다”라고 박 대표가 말하는 이유다.

ⓒ일사에프 유튜브 갈무리유튜브 채널 ‘일사에프’의 ‘아이돈케어’ 시리즈는 조회 수 100만 회를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다.

‘소확행’은 가고 ‘재테크’가 왔다

이제 어피티 구독자들 사이에서는 ‘욜로 가면 골로 간다’ ‘덮어놓고 쓰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등의 근검절약이 생활 지침처럼 공유된다. 밀레니얼 세대의 성향을 ‘소확행’이나 ‘욜로’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수명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조예진씨(21)가 산증인이다. 스무 살에 뷰티 계열 회사에 취업하자마자 신용카드를 만들었던 것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월급만 믿고 쓰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늘었더라고요.” 한때 불었던 ‘욜로’ 바람에 그의 통장은 너덜너덜해졌다. 어피티의 재테크 조언에 따라 고정 지출을 처음 계산해본 날, 충격이 컸다. 작년 한 해 동안 산 화장품 비용만 80만원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조씨는 그 이후 ‘꾸밈 노동’을 그만두었다.

그는 올해 초 비혼을 결심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차 있는 남자친구를 선택하라거나 돈 많은 남편을 만나라는 이야기는 흔했어도 차를 사고, 돈을 벌라는 얘기는 흔치 않았으니까요.” 한때 다이어트·화장품·연애가 주였던 대화 주제가 요즘 뜨는 테마주, 고금리 저축 상품, 청년 전세대출 등으로 대체되었다고 조씨는 말했다. 비혼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에 대한 감각은 필수였다.

여성들이 돈을 벌고 쓰고 모으는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팔린다. 유튜브 ‘일사에프(14f)’에서는 여성 자산관리사가 경제 꿀팁을 전수하는 ‘아이돈케어’ 시리즈가 100만 회를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외에도 사회 초년생 여성의 가계부를 분석해 재테크 상담을 하거나(‘하말넘많’ 당신의 가계부 시리즈), 비혼 여성들이 내 집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동산 팁을 전수한다(‘혼삶비결’ 자기만의 방 시리즈). “누구는 연봉 8000만원, 누구는 3억원 모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멀게만 느껴졌는데, 어떻게 돈을 벌고 모으는지 맥락이 나오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극을 받는다(강가람).” 황지은씨도 ‘1억원 모으기’라는 목표를 설정했다. 왜 우리는 지금껏 돈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한탄 섞인 후회가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여성들이 주식과 재테크를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여성의 재테크를 새로운 현상으로 주목하게 될 경우 기존 역사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경제 확장에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해왔음에도 여성은 경제관념이 없다거나 ‘복부인’으로 불려왔다. 아파트값이 안 잡히는 것이 부녀회 담합 때문이라는 식의 사회적 프레임 탓에 경제적 주체로서 여성들의 이야기가 배제되어왔다.” 자립을 원해도 활로를 찾지 못했던 2030 여성들에게 “너도 1억원을 모을 수 있다” “돈 많은 여성이 많아지면 좋겠다”라는 경제 콘텐츠들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이 연 새로운 장이 되었다.

사회생활 1년 차 황지은씨는 ‘마음의 평화가 통장 잔고에서 나온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어요.” 남녀 누구나 불안정한 현실 아래서 ‘돈의 힘’을 믿게 되었다. 다만 여성들이 돈과 자립을 말할 공간은 이제 막 넓어지기 시작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