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나쁜 놈들 쫓는 게 왜 중요한지 알아야”
  • 워싱턴/ 나경희 기자
  • 호수 637
  • 승인 2019.12.05 09: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찰스 루이스가 아메리칸 대학 저널리즘스쿨에 차린 ‘탐사보도 워크숍(IRW)’은 30여 개 언론사와 협업한다. IRW는 금융위기 때 8000여 개 은행의 재무 위기를 폭로하는 기사로 파란을 일으켰다.
ⓒ시사IN 신선영CBS 뉴스 PD로 이름을 날렸던 찰스 루이스(사진)는 대학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IRW의 탐사보도 프로젝트를 지휘한다.

‘척’ 하면 모두 통했다. 찰스 루이스라는 본명보다 척(Chuck)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미국 전역의 비영리 저널리즘 기자들이 스스럼없이 찾는 멘토이자 친구다. 취재진이 찰스 루이스와 인터뷰할 예정이라고 말하자 모두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은 사람이죠. 척에게 안부 전해줘요.”

찰스 루이스는 ABC 뉴스에서 ‘워터게이트’를 고발한 칼 번스타인과 함께 일했고, CBS 뉴스 <60분>에서 PD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자신이 기획한 기사가 번번이 가로막히자 루이스는 회사를 떠났다. 눈치 보지 않는 언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1989년 공공청렴센터(CPI)를 만들고, 1997년에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를 꾸렸다.

2000년 CPI는 특종 기사를 하나 터뜨렸다. 재선을 노리던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이 딕 체니를 부통령 후보로 발표한 직후였다. CPI는 딕 체니가 석유 채굴 기업인 할리버튼사 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할리버튼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부당하게 정부 계약을 따내고 세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할리버튼은 CP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사를 상대로 한 소송 중 25년 만에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CPI를 이끌던 찰스 루이스는 <독립언론 펀드(Fund for Independence in Journalism)>를 만들어 대응에 나섰다. <독립언론 펀드>는 CPI의 ‘구명보트’와 같았다. 소송에 져 CPI가 문을 닫더라도 기자들이 계속 취재를 이어갈 수 있는 조직을 미리 만든 것이다. 그는 대기업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글로벌 인티그리티(Global Integrity· GI)>라는 매체를 만들어 취재를 전 세계로 확장했다. 2004년 GI는 25개국 정부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조사한 75만 자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전 세계 기자 250여 명이 참여한 기획이었다.

소송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이듬해에야 기각됐다. 5년 만에 큰 짐을 덜어낸 루이스는 2005년 CPI를 떠나 새로운 모험을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 저널리즘스쿨에 <탐사보도 워크숍(IRW·Inves-tigative Reporting Workshop)> 사무실을 차렸다. IRW는 그가 만든 다섯 번째 미디어인 셈이다.

그는 아메리칸 대학 교수로서 직접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IRW의 탐사보도 프로젝트를 지휘하기도 한다. IRW는 30여 개 언론사와 협업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워싱턴 포스트>와 PBS의 <프런트라인>과 주로 작업한다. 건물 지하 스튜디오에는 IRW와 협업하는 <프런트라인> 팀 기자 3명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은 1년에 한 편씩 영상을 제작한다.

취재진은 10월25일 아메리칸 대학 저널리즘스쿨의 빈 강의실에서 찰스 루이스를 만났다. 그는 현재 <위스콘신 워치>를 비롯한 비영리 언론사 10곳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왜 안정기에 접어든 CPI를 떠나 IRW를 만들었나?

전국에서 언론사가 사라지고 있다. 미국 저널리즘은 위기에 빠졌다. 미래의 사람들은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게 뭐야?”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저널리즘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가르쳐야 한다. 진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나쁜 놈들(bastards)을 뒤쫓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주어야 한다. 희망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저널리즘을 회복시켜야 한다. 많은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강의하지만, 악당들을 추적하는 탐사보도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나?

내가 가르치는 <국제탐사보도> 과목은 학기마다 학생 20~25명이 듣는데, 많은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이 정말 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 100% 확신하지 못한다. 탐사보도라는 단어는 멋있게 들리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무척 힘든 일이다. 지금까지 300명쯤 내 수업을 거쳐갔는데, 탐사보도를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진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기록을 뒤지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를 꺼린다. 나는 학생들이 저널리즘의 진가를 알아보도록 하는 데 수업 시간 대부분을 쓴다. 나머지에는 실제로 어떻게 탐사보도 저널리즘을 할 것인지 가르친다. 나는 그저 학생들이 저널리즘에 대해 배우고 무엇인가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시사IN 신선영‘탐사보도의 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언론인의 사진이 IRW 사무실에 걸려 있다.

수많은 대학교 중에 왜 아메리칸 대학을 선택했나?

2005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 초빙교수로, 2006년에는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 쇼렌스타인 센터에 펠로로 있었다. 그런 곳에 초대받으면 보통 두꺼운 책을 하나씩 써야 한다(웃음). 2007년에는 나도 2만 단어쯤 되는 논문을 한 편 썼다. ‘중요해지는 비영리 저널리즘(The Growing Importance of Nonprofit Journalism)’이라는 제목인데, 비영리 탐사보도를 광범위하게 다룬 최초의 논문이었다. 그 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영리센터를 하나 맡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아쉽지만 나는 뉴욕으로 이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아메리칸 대학은 워싱턴 한복판에 있으니까 부담이 덜했다.

IRW에서 활동하는 다른 기자들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다. 201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존 설리번 수석 편집장, 린 페리 비주얼 편집장, 제니퍼 라플레 데이터 편집장. 모두의 경력을 합치면 100년이 훌쩍 넘는다.

<프런트라인> 팀과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미국 최대의 프로그램 콩쿠르인 에미상을 수상한 릭 영 프로듀서가 총괄한다. <프런트라인> 팀은 보스턴에 있는 본부에서 월급을 받고, 해마다 50만~70만 달러(약 5억8000만~8억1700만원)에 달하는 프로젝트 비용을 끌어온다. 그들은 IRW와 어떤 아이템을 다룰지 논의하고 함께 기사를 작성한다. 아메리칸 대학 학생들은 그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학점을 받는다. 지금 <프런트라인> 팀은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다.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는 릭 영 프로듀서가 5년 넘게 관심을 쏟는 이슈다.

IRW가 현재 기획 중인 기사는?

‘탐사보도의 힘(Investigating Power)’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1950년부터 2020년까지 활동했던, 혹은 지금까지 활동 중인 전설적인 탐사보도 기자 40여 명을 필름에 담고 있다. 지금까지 내 상사였던 칼 번스타인, 그와 함께 ‘워터게이트’를 보도했던 밥 우드워드, 베트남전쟁 당시 자행됐던 미라이 학살 등을 밝혀낸 세이무어 허시 등 27명을 인터뷰했다.

‘뱅크트래커(Banktracker)’는 IRW가 2009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다.

IRW를 막 시작했을 때 금융위기가 닥쳤다. 우리는 은행 8000여 개가 재무적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행협회(ABA)는 만약 기사가 나가면 우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이 집에서 더 이상 못 살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학장에게는 한 문장으로 된 간단한 메일을 보냈다. ‘법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1분도 되지 않아 학장이 답장을 보냈다. 답장 역시 한 줄이었다. ‘좋은 기사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우리는 기사를 내보냈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톱뉴스로 다뤄졌다. 홈페이지 트래픽 수가 치솟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맡긴 은행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6개월마다 한 번 수치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기업이나 노조로부터 후원을 받지 않는 까닭이 있나?

우리 집에서 CPI를 시작한 첫날부터 지켜온 원칙이 있다. 비영리언론협회(INN, <시사IN> 제636호 ‘비영리 언론사가 생존할 길 찾다’ 기사 참조)를 만들 때에도 회원들에게 요구한 조건인데, 돈을 받으면 반드시 출처를 밝히는 것이다. CPI는 원래 기업과 노조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액수의 후원금을 받고 출처를 밝혔다. 하지만 곧 보수적인 언론들이 ‘CPI가 노조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업으로부터도 같은 금액의 돈을 받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1994년 기업이든 노조든 양측으로부터 모두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재단 후원금, 개인 후원금, 계약 수익금으로 운영한다.

계약 수익금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CPI는 10년 동안 ABC 뉴스와 계약을 맺었다. ABC 뉴스는 우리 기사를 제일 먼저 보도하길 원했다. 그들은 우리가 프레스클럽에서 기사를 발표하기 일주일 전에 미리 기사를 받아 봤다. 그래야 우리가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보도할 수 있으니까. 그 대가로 우리에게 1년에 10만 달러(약 1억1700만원)를 지불했다.

ⓒ시사IN 신선영IRW와 협업하는 <프런트라인>의 프리츠 크래머 PD.

무엇보다 재단과 개인의 후원금이 없다면 오늘날 미국의 비영리 언론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 같다.

미국에는 비영리 재단에 기부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다. 부자들은 저널리즘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 세금 감면 혜택을 보기 위해 기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기부를 하는 모습은 멋져 보이니까(웃음).

기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도 CPI를 세운 뒤 처음 2~3년 동안은 꽤 초조하고 겁이 났다. 책상 한쪽에서 직원들 월급 수표를 쓰고, 다른 한쪽에서 기사를 썼다. 나는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했다. 행복했지만, 분명 힘든 일이었다. 후원을 부탁하는 편지 100통을 보내면 답장 한 통이 올까 말까 했다. 어쨌든 그게 조금이나마 편집국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7000~8000통에 달하는 편지에 서명하곤 했다.

비영리 언론사에 법적 분쟁은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보도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내 성격이 한몫하는 것 같다. 나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델라웨어주의 가난한 동네 변두리에서 자랐다. 나는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게 싫다. 이런 거친 단어를 써서 미안하지만, 그런 ‘개소리(bullshit)’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나는 델라웨어주에서 가장 큰 신문사인 <윌밍턴 뉴스저널>에서 스포츠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나는 곧 운동선수들을 조사했다. 고작 수업 한 편 들어놓고는 모든 과정을 이수했다고 거짓말하는 축구 선수에 대한 기사를 썼다. 회사는 이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공격적으로 기사를 쓰는 골칫거리였다. 대신 다른 언론사에서 내 기사에 관심을 보였다.

탐사보도에 헌신해온 이유가 무엇인가?

나쁜 놈들을 추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예전에 한 기자가 동물을 죽이는 나쁜 놈들을 뒤쫓았는데, 3년 동안 44개 주를 돌아다니더라. 나중에 어떻게 취재했냐고 물어보니 “그들이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도 그 옆 칸에서 볼일을 봤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지 않나. 이런 게 저널리즘의 즐거움이다.

비영리 저널리즘의 어떤 특성이 거침없는 탐사보도를 가능하게 하나?

비영리 저널리즘이 존재할 수 있는 건 기꺼이 돈을 내는 후원자들 덕분이다. 뉴스가 없다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만약 언론이 없다면 지역 커뮤니티도 사라지고, 이웃끼리는 말도 섞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도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다.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스스로 정보를 찾는다. 문제는 지역 언론사도, 라디오도, 방송사도 없는 ‘뉴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다. 무지와 무관심이 풍토병처럼 번지고 있다. 미국 50개 주 중 절반이 넘는 27개 주 행정부에 대한 보도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미국 국민의 40%가 부대통령 후보자의 이름도 모르고, 투표율은 50%대다. 나는 종종 방송 인터뷰에 나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멘트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제 나는 ‘가급적 3음절 이내의 단어만 써서 6초를 넘기지 않게 말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0년 전 멘트 길이는 44초였다. 저널리즘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영리 언론이 답일까?

답의 일부다. 비영리 언론사 240여 곳이 이미 사라진 언론사 수천 곳의 빈자리를 모두 채울 순 없겠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