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욘사마 ‘김지영’ 일본 열도 뒤집었다
  • 도쿄·김승복 (출판사 쿠온·책거리 서점 대표)
  • 호수 637
  • 승인 2019.12.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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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복 제공11월9일 도쿄 진보초에서 열린 ‘한국 책을 위한 북페스티벌’에는 1200여 명이 참가했다.

11월9일 세계적인 책방 거리 도쿄 진보초에서 한국 책을 위한 북페스티벌(2019 K- Book Festival)이 열렸다. 한국 책을 번역 출판한 19개 일본 출판사와 한국 독립서점 고요서사, 땡스북스, 위트앤시니컬이 한국 책을 소개했다. 하루 행사에 1200여 명이 찾아와 책을 샀고 토크 이벤트에 흠뻑 빠졌다. 한국에서 이기호 소설가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쓴 이민경 작가가 참석해 한국 페미니즘에 관심이 높은 일본 독자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 쓰인 작품, 특히 여성 작가 작품이 많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주로 소설이다. 그림책이며 실용도서, 인문서 등도 일본 시장에서 통할 작품들이 많아 보이는데 문학에 집중되고 있다. 일본 독자들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한국 책을 위한 북페스티벌을 벌인 계기다. 열정 가득한 독자들을 직접 만난 한국 편집자들이 더 많은 책을 내야겠다고 다짐하고 이 페스티벌에 맞추어 신간을 기획하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문학이 성황을 누리게 된 계기는 박민규의 〈카스테라〉가 2015년 제1회 일본번역대상을 수상하면서다. 이렇게 기발한 발상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한국에 있다며 소설을 좋아하는 많은 일본 독자들이 감탄했다.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았다. 이웃 나라 소설이 소재도 참신한데 작품성까지 높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마침 필자가 운영하는 출판사 쿠온에서 ‘새로운 한국문학’ 시리즈로 박민규를 비롯해 한강, 은희경, 김연수, 박성원, 김애란, 김언수, 구효서, 김중혁, 정세랑의 소설을 번역해 내놓은 터라 눈 밝은 독자는 물론 다른 출판사들이 이들 작가의 다른 작품을 타진했다. 이후 중견 출판사인 쇼분샤가 2017~2018년에 〈달려라 아비〉(김애란), 〈희랍어 시간〉(한강), 〈고래〉(천명관),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아무도 아닌〉(황정은)을 펴내 일본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국문학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일간지 서평 코너를 장식했고 책 읽는 연예인들이 한국 소설을 소개하자 일반 독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서점 직원들이 가장 먼저 반응해 서점 해외 문학 코너뿐만이 아니라 중심 진열대에 한국문학이 등장했다(일본에서는 출판사가 서점에 돈을 내고 진열대를 사지 않는다).

출판이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매우 보수적인 업계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이란 시간의 축적이라 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닌가. 이름 있는 중견 출판사가 한국문학을 시리즈로 냄으로써 시민권을 얻은 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합뉴스〈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오른쪽)와 일본어판 번역자 사이토 마리코 씨.

2018년 한국문학을 번역 출판한 8개 출판사가 각 서점에 한국문학 페어를 제안해 진열 판매를 요청했다. 그 결과 서점 50여 곳이 참가했다. 올해는 11개 출판사가 모여 약 150개 서점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약 5개월간 한국문학 페어를 할 수 있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서점은 출판사에서 책을 위탁받아 판매한다. 판매가 안 되면 바로 반품한다. 5개월간 중앙 매대에서 한국문학을 진열 판매한 것은 판매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11년 〈채식주의자〉를 펴내 서점 영업을 할 때에는 한국문학이라는 안내판도 없었다. 그때에 비하면 1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다.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냉랭한 한·일 관계 속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5개월간 계속된 한국문학 페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역시 〈82년생 김지영〉이었다(11월 현재 14만8000부 판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 전국 서점에서 선전한 결과, 김수현의 에세이집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지난 2월에 번역 출판되어 현재 20만 부 넘게 팔렸다.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도 인기를 끌어 일본 여성 독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계간 문예지 〈문예(文藝)〉는 가을호 특집으로 ‘한국·페미니즘·일본’을 기획해 한강, 이랑, 박솔뫼,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실었다. 한국어로 발표되기 전에 일본어로 먼저 소개되는 등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문예〉는 1933년 창간 이래 처음으로 3쇄를 찍었고 11월 말에는 단행본으로도 나온다).

‘우경화’ NHK, 김지영 현상 여러 차례 다뤄

계간지 〈문예〉에 이어 타바북스에서 나온 〈한국 페미니즘과 우리〉라는 단행본 역시 한국 작가들, 시민운동가들에게 원고를 직접 받아 출판됐다. 한국의 페미니즘에 관한 단상이 거의 실시간으로, 아니 일본에서 더 먼저 발표가 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불러일으킨 현상이다.

왜 일본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이렇게 인기 있는가. 한국과 일본은 문학적 감수성이 가장 가까운 나라다(일본 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감수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본 여성들이 김지영이라는 그리 강하지 않은(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센 여성이 아닌) 캐릭터를 통해 자신들도 알게 모르게 억압받는 사실을 깨닫고 공감한 것이라고 일본어판 〈82년생 김지영〉을 담당한 편집자 이구치 가오리 씨는 말한다. 그는 독자 후기를 통해 알게 된 의미심장한 분석도 들려주었다. 일본인 작가가 아닌 한국 작가에게 듣는 한국 이야기라서 무거운 주제지만 접근이 용이했다는 후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점이 바로 일본인의 다테마에(建前·겉마음)와 혼네(本音·속마음)이기도 할 터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소설은 악화된 한·일 정세 속에서 언론이 균형을 잡기 위해 여러모로 언급하기 쉬운 소재이다. 징용공 배상 문제, 화이트리스트, 한국의 불매운동 등 일련의 한국 소식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본 안방을 달군 가운데 양심 있는 일본 저널리스트들은 이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기사를 내보내려고 애썼다. 그런 기자들에게 한국문학과 김지영의 인기는 안성맞춤 소재가 아니었을까. 우경화되어가는 NHK에서도 몇 차례나 ‘김지영 현상’을 다루었고, 민영방송사에서도 연예인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소개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한국문학 특집을 실었다.

필자는 일본의 미디어와 인터뷰할 때마다 “김지영은 일본에서 한국문학의 욘사마”라고 말했다.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다른 한국 드라마가 일본 안방을 차지한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으로 인해 다른 작품들이 빠르게 계약되었다. 문학적 수준을 차치하고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점에서 많은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을 주목했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시장도 뜨겁다. 〈언어의 온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그래도 괜찮은 하루〉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등이 줄지어 나올 예정이다.

‘김지영 이후의 현상’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82년생 김지영〉 이후 얼마나 많은 한국 책들이 번역 출판되고 많이 읽히고 있는지에 대한 영상이 내 머리 속에서 휙 스쳐 지나갔다. 이 글을 쓰면서 김지영이 불러온 현상이 단지 한국문학에, 한국 책에 열광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도 젊은이들에게 가혹한 사회라서 ‘스스로 위로하고,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에 공감한 것이다. 비록 이웃 나라 작가들의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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