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횡포’ ISDS 폐지해야 한다
  •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 호수 622
  • 승인 2019.08.23 17: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전범기업이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에 불복할 수 있는 것은 ISDS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사법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투자자만 우대하는 ISDS를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법원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피해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기업은 패소하고도 배상을 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기업이 가진 자산을 강제로 팔아 그 돈으로 배상을 받는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대개 이렇게 마무리된다. 외국 기업이면 여기서 끝이 아닐 수 있다. 외국 기업은 한국 법원의 판결로 ‘손해배상을 하는 손해’를 입었다며 도리어 한국을 제소할 수 있다. 허무맹랑한가? 어쩌면 우리는 곧 이런 일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최근 한·일 무역전쟁의 촉발제가 된 대법원 판결이 바로 그 대상이다.

지난해 말 대법원은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에 잇달아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별개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 같은 취지의 하급심 판결도 뒤따랐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배상을 하지 않고 버텼다. 피해자들은 하는 수 없이 이들 기업이 국내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주식·특허권·상표권 등)을 팔아 그 매각 대금으로 배상받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정당한 절차다.

기업·로펌의 경영·돈벌이 수단이 된 ISDS

정말로 강제 매각이 되면, 이들 전범기업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일을 당했다며 도리어 한국에 손해배상을 청구할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미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다.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이런 황당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2003년 발효된 한일 투자보장협정이다. 이 협정 제15조에 따르면, 일본 투자자는 한국의 어떤 행위로 협정에서 보장한 투자자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면 한국에 직접 손해배상을 구하는 ‘중재’를 신청할 수 있다. 이 중재의 정식 명칭이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ISDS)다. 국가라고 항상 옳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도 잘못을 하면 배상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행정소송, 국가배상 청구 소송 등 사법적 구제 절차를 만들어두었다. 외국인이라고 이런 구제 절차를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연합뉴스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학생들이 7일 오전 서울 중구 미쓰비시 상사 앞에서 강제징용 사죄 및 배상, 국내에서의 철수를 촉구하고 있다. 2019.8.7

 

 

 

그러나 ISDS는 이런 구제 절차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ISDS는 국가가 법에 따라 정당한 행위를 했는지 따지지 않는다. 국가가 투자보장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투자자 보호 규정을 위반했는지 따진다. 합법적인 행위라도 협정 위반으로 해석될 수 있다. ISDS는 정부의 행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행정·입법·사법 전 분야의 국가 작용이 그 대상이다.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에 일본 기업이 불복할 수 있는 이유다. ISDS에서는 판사가 판결하지 않는다. 변호사, 대학교수 등 외국의 민간인이 보수를 받고 판정한다. 이들은 투자자-국가 간 분쟁이 늘어날수록 돈을 버는 무리다. ISDS에는 헌법의 공개재판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대부분 비공개로 진행된다. ISDS란 소송이 아니라는 것을 본질로 하는, 외국인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인 셈이다.

한국 정부는 1964년 독일과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면서 처음 ISDS 규정을 둔 이래, 전 세계 150여 개 국가와 투자보장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ISDS 규정을 삽입해왔다.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한국은 ISDS 당할 일이 없다며 막무가내였다.

한국은 더 이상 ISDS 무풍지대가 아니다. 그 반대다. 2012년 론스타가 5조원대 중재를 제기한 이래 엘리엇, 메이슨, 게일, 버자야 등 외국 기업이 줄지어 중재를 신청했거나 신청할 예정이다. 여기에 해외 동포들까지 가세했다. 현재 총 중재 건수는 10건, 누적 청구액은 12조원에 이른다. 한국만 이런 상황이 아니다. ISDS가 기업의 경영 수단 또는 대형 로펌의 돈벌이 수단으로 활성화되면서, 한국과 같은 처지의 국가도 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사법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 투자자만 지나치게 우대하는 ISDS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한창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는 ISDS가 “강자의 횡포”로 “폐지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동의에 100% 동의한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