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남승룡과 함께 달린 일본의 양심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22
  • 승인 2019.08.2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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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 남승룡이 밟아온 영광의 길 뒤에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었다. 오다 미키오는 조선인의 올림픽 출전을 도왔고, 아사쿠마 요시로는 일본의 협잡을 좌시하지 않았다. 조선의 열망과 일본의 양심이 손잡은 성과였다.
ⓒDPA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왼쪽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

 

1931년 양정고보생 김은배는 조선신궁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26분12초라는 비공인 세계기록을 수립한다. 조선 전체가 요란법석, 흥분의 대표 선발 도가니가 된 건 당연하지. “조선인이 지은 세계적 기록의 효시로서 홀로 김군의 영예일 뿐 아니라 널리 조선인 전체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동아일보> 1931년 10월20일).”

일본 메이지 대학에 재학 중이던 권태하도 조선에서 세운 세계신기록 소식에 한껏 들뜬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학교에서 만능 스포츠맨으로 통하던 권태하는 김은배의 쾌거를 전해 듣고는 산에 캠프를 차리고 맹훈련을 거듭했지. 그 결과가 황당할 만큼 탁월했어. 올림픽에 나갈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거야. 1위는 권태하, 2위가 김은배, 3위가 일본인 쓰다 세이이치로였다. 이 세 명이 고스란히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일본 대표로 출전하게 돼.

일본인들로서는 매우 떨떠름한 일이었어.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 우승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세계에 끼는 모습을 당당하게 연출해보고 싶었는데 그 대표팀 셋 가운데 둘이 조선인이란 말이지.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는 일본의 올림픽 대표였던 권태하 본인에게 일어난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 “올림픽 떠나는 길에 관부연락선 안에서 술 취한 경관에게 맞았다. 무슨 이유로 맞았느냐. 나는 매 맞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꿀꺽 참고 대거리 못하고 맞은 것이다(<동아일보> 1932년 6월24일).” 올림픽에서도 권태하는 부당한 요구를 받아. 일본인 선수 쓰다 세이이치로의 페이스메이커를 하라는 강요였지. 권태하는 이를 거부하고 달려 나갔어. 오기와 분노가 오버 페이스를 부른 탓인지 막판 체력 저하로 선두에서 멀어졌고 9위로 경기를 마친다.

이후 권태하는 자신의 꿈을 풀어줄 만한 조선인 마라토너 두 명에 주목하게 돼. 손기정과 남승룡이었지. 권태하는 올림픽 출전 전에 함께 연습하기도 했던 손기정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손 군과 함께 연습하면서 손 군이 가진 뛰어난 마라톤 소질을 보았네. 손 군이라면 틀림없이 세계 마라톤을 제패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이태영, <불멸의 혼 손기정>).” 그때까지 중장거리 선수였던 손기정은 영웅으로 우러러보던 선배의 편지에 용기백배, 마라톤에 뛰어들게 돼. 손기정은 연거푸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부동의 일본 대표 자리를 확보했고, 남승룡도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선발전 1위를 차지했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 다가오면서 일본인들은 또 옹졸한 짓을 벌인다. 이번에는 마라톤만이 문제가 아니었어. 전 일본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경성축구단 가운데 단 두 명만 일본 축구대표로 뽑은 건 시작일 뿐, 역도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한 남수일이나 레슬링 최강자 황병관도 배제됐다. 거기에다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이어 또다시 마라톤 국가대표 세 명 중 두 명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성마른 일본인들은 용납하기 어려워했지.

ⓒAP Photo오다 미키오는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남승룡을 배제할 이유 없다”

선발전이 끝나고 열린 육상연맹 기술위원회에서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어. 남승룡을 빼자는 논의였지. 그 자리에는 총독부 학무국에 근무하던 조선인 정상희가 참석해 있었는데 그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최종 선발전 1등을 어떻게 제외합니까. 조선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일본인들 대부분이 고개를 외로 꼬는 가운데 한 일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어. “정상희씨의 말이 옳습니다. 남승룡은 선발전 우승으로 실력을 확인해주었으며, 그를 배제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느 놈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 발끈하며 돌아본 일본인 기술위원도 필시 있었겠지만 발언자를 보고 끙 하며 곧바로 돌아앉았을 거야. 발언의 주인공은 일본 육상의 영웅 오다 미키오였거든. 그는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 육상 3단 뛰기 종목에서 15.21m를 기록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어.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지. 먼 훗날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릴 때 내걸린 일장기 높이는 정확하게 15.21m였다고 해. 오다 미키오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어. 그 정도의 위상을 지닌 스포츠 영웅이 멋진 스포츠맨십을 발휘해준 거야.

문제는 첩첩산중이었어.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조선인 선수들에게 자신의 페이스메이커 노릇을 강요했고 레이스 도중 자신을 앞지르지 말라고 망발한 바로 그자, 쓰다 세이이치로가 일본 마라톤 팀의 코치였던 거야. 그가 대표팀에 있는 한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 이 문제를 주목한 이가 쓰다 세이이치로를 톡톡히 경험한 권태하였어. 아래는 권태하의 편지야.

“그가 코치를 맡는 이상 그대들은 모국의 동포가 기대하는 성과를 올릴 수 없을뿐더러 올림픽 무대를 달릴 영광도 얻지 못할지 모르겠네. 나는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쓰다 기용불가론’을 펼칠 테니 그대들은 그 배척운동을 전개하게. 이 뜻을 나를 이해하는 오다 미키오에게도 전해두었네.”

권태하는 “일본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경성일보>에 3회에 걸쳐 기고한다.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토로하고 일본의 마라톤 우승을 위해서는(이라고 썼겠지만 손기정과 남승룡을 위해서라고 읽어야겠지) 쓰다 코치를 잘라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어. 동시에 그 기고를 <아사히 신문>에도 보냈지. <아사히 신문> 스포츠부장이 바로 오다 미키오였거든. <아사히 신문>은 그 기고를 토대로 쓰다 코치 문제를 보도했고 오다 미키오 역시 움직였다. “오다 미키오는 일본 체육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는데 권태하 선배의 편지가 주효했던지 베를린으로 떠나기 2주일 전 신병상의 이유라는 발표와 함께 코치가 바뀌었다(<동아일보> 손기정 기고문, 1976년 1월13일).”

결국 일본은 3명이 아닌 4명의 선수를 베를린으로 출발시킨다. 어떻게든 일본 선수 2명을 출전시키려는 심산이었지. 그런데 베를린에서 남승룡과 손기정은 후발대로 출발한 일본 육상 선수 아사쿠마 요시로의 전보를 받는다. “베를린 현지에서 조선인 한 명을 반드시 탈락시키게 되어 있다고 육상연맹 임원들이 떠드는 걸 들었소, 대비하시오.” 아사쿠마는 손기정·남승룡과 친했고 일본인들이 욕설이나 해코지를 하면 먼저 나서서 박살을 내버린 열혈 청년이었다고 해.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 전보를 받고 역사에 다시없을 올림픽 현지 선발전 준비에 몰두하게 되지(<시사IN> 제547호 ‘최초의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을 기억하다’ 기사 참조).

손기정과 남승룡이 밟아온 영광의 뒤안길은 이처럼 험난했어. 옹졸하기 그지없던 일본인들과 조선인 올림픽 대표의 뺨을 올려붙이던 일본 경관 같은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권태하, 정상희, 그리고 손기정과 남승룡 등 조선인은 결연하게 맞섰다. 동시에 그들 곁에는 양심적인 일본인이자 일본의 영웅인 오다 미키오, 그리고 조선인을 못살게 구는 일본인들을 앞장서서 혼쭐내던 아사쿠마 요시로가 있었어.

남승룡과 손기정의 쾌거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위대한 쾌거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열망과 일본의 양심들이 손잡은 성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네가 기억해줬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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