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고아들의 일본인 아버지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24
  • 승인 2019.09.0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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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조선인 고아 수천명을 데려다 키운 일본인 소다 가이치는 자신이 키운 아이가 자라 독립운동을 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조선이 해방되자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회개와 반성 운동’을 벌였다.
ⓒ영락보린원 제공1961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은 소다 가이치.

요즘 한국에서 엄청난 원성을 듣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선거구는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라 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조슈번의 후신이기도 해. 한반도를 제물로 삼아 일본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침략 근성을 드러낸 인물들도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정한론을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미우라 고로, 식민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이 모두 이 조슈번, 즉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출신이야. 이 지역 출신으로서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도 있어. 오늘 소개하려는 소다 가이치(1867~1962)라는 사람이지.

젊어서 그의 삶은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하는 방랑자의 그것이었어. 스무 살 넘어 고향을 떠나 나가사키로 간 소다는 탄광에서 일하며 교사 자격증을 따더니, 교사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배를 탔단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타이완을 빼앗은 뒤에는 그곳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고, 중국 혁명가 쑨원을 만나 중국 혁명운동에도 가담했어.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어. “젊을 때 대주가였으며 혈기왕성하여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불량배였다.”

타이완에서도 그 술버릇은 여전했지. 하루는 인사불성으로 마시고 어느 뒷골목에 쓰러져 빈사 상태에 처했는데, 그를 살려준 사람이 있었어. 이 의인은 소다를 부축해 여관으로 옮기고, 먹이고, 재우고, 치료까지 해준 뒤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지. 소다 가이치가 알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은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뿐이었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은인의 나라 조선을 찾아왔지.

조선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후일의 YMCA) 일본어 교사로 일하게 된 그는 또 한 번 변신을 경험한다.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지. 특히 그를 감화시킨 사람은 바로 월남 이상재였어. 소다 가이치가 한국에 온 건 1905년. 이미 대한제국에 망국의 그림자가 짙어질 때였지.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서 이상재는 기독교 전파를 통해 조선인들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소다 가이치는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거야. 더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일본어 교사 우에노 다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를 겪었다고 봐야지. 억병으로 퍼 마시다가 죽을 뻔했던 사람이 술을 끊고, 금주회를 조직해 다른 사람들까지 술을 끊게 만든 건 출발에 불과했단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나를 원수로 보지 말고 한 인간으로 대해주시오(<동아일보> 1962년 3월29일)”라고 호소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소다 가이치는 조선 청년들이 일본인인 자신을 원수로 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어. 1911년 일제 당국이 조선의 민족운동을 뿌리째 뽑으려는 심산으로 단순한 모금 운동을 총독 암살 음모 사건으로 뻥튀기한 ‘105인 사건’이 터졌다. 이승훈·전덕기·이상재·안창호 등을 비롯해 600여 명이 체포되고 105명이 구속됐지. 소다 가이치의 YMCA 동료들도 부지기수로 잡혀 들어가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고 해. 이를 본 소다 가이치는 분기충천하여 조선 총독부로 달려가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만난다. “당장 잡혀간 조선인들을 석방해주시오.” 자신과 동향으로 비슷한 사투리를 쓰는 소다의 열띤 항의를 들으며 데라우치 총독은 어안이 벙벙했을 거야. ‘뭐 이런 일본인이 다 있지?’ 하면서.

1921년 소다 가이치는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 고아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경성 바닥에 널려 있던 고아들,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데리고 오는 와중에 그는 조선인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지. “저 왜놈의 자식이 조선 아이들을 어디다가 팔아먹으려고.” 일본인에게는 비국민 취급을 받으면서 조선인들에게도 비난을 들었던 그였으나, 소다는 수십 년 동안 조선인 고아 수천명을 데려다 길러냈다.

후일 소다 가이치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이라도 보겠다고 달려온 장성한 고아들의 회고는 눈물겹다. “군부대에 리어카를 직접 끌고 가서 밥을 얻어 고아들을 먹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조선 사랑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험악한 눈총을 샀다. 하루는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서 소다 가이치를 연행해 갔어. 고아원 출신 중의 한 청년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됐기 때문이야. 뜻하지 않은 곤욕을 치르면서도 소다 가이치는 오히려 자신이 길러낸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해.

ⓒ영락보린원 제공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일본어 교사를 하며 민족운동가들과 함께했던 소다 가이치(앞줄 오른쪽 세 번째).

고아들을 거두기 위해 악전고투하다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던 어느 날, 소다 가이치는 마당에서 보따리 하나를 발견하게 돼. 그 속에는 거금 1000원과 익명의 조선인이 쓴 편지가 들어 있었어. “동포들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 국외로 나갑니다. 저는 도둑놈이 아닙니다. 이 돈을 고아들을 위해 써주십시오.” 이름 모를 조선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원받아 인생이 바뀌었던 소다 가이치에게 또 하나의 이름 모를 조선인이 준 선물이 얼마나 큰 무게였을까 짐작해보렴.

고아들은 그를 ‘하늘 아버지’라 불러

일본의 패망으로 1945년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자, 수십 년간 고아들과 함께해온 소다 가이치 부부는 또 한 번 중대한 결심을 해. 아내는 조선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고 남편인 소다는 일본으로 돌아가 패망한 일본을 위한 회개와 반성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지. 세계 평화와 조선 강점에 대한 참회를 부르짖으며 일본 곳곳을 누비던 그는 자신의 좌우명을 이렇게 기록해두었다고 해.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 고린도후서 6장10절 말씀의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뜻이야. 두 번째는 “단호히 행하면 성령이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의미의 ‘단행성령조지의(斷行聖靈助之矣)’. 이런 결심으로 헤어진 부부는 그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50년 1월 소다 가이치의 부인은 한국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거든. 소다는 그 장례식에도 함께할 수 없었단다. 국교 수립 이전에 일본인이 한국에 들어오는 일은 녹록지 않았으니까.

한국인들과 함께하기를 소망하던 ‘하늘 아버지(고아들이 그를 부른 호칭)’ 일본인 소다 가이치는 1961년 초청을 받아 귀국해 꿈을 이룬다. 그리고 이듬해 아흔다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 그의 시신은 이미 한국 땅에 묻혀 있던 아내와 함께 양화진 외인묘지에 합장으로 모셔졌어. 일본에 있던 가족들은 고인의 수염을 잘라 일본의 가족묘지에 모셨다고 해.  

아빠는 네게 “이런 일본인도 있었단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나쁜 사람도 많고 좋은 사람은 더 많아. 역사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와 가해의 일원이 되는 비극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아빠는 그 와중에도 일본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분투했던 사연을 들려주고 싶은 거란다. 동시에 우리가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기도 하지. 그가 해방 직후 일본에 돌아가 남긴 말을 곱씹어보자꾸나. “한·일 친선은 이루어질 것이다. 경성에만 한국인과 결혼한 여성이 700∼800명이다. 재일 한국인 60만명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조금 더 올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지금 들어도 울림이 크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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