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롱하게 빛났던 한·일 교류의 순간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21
  • 승인 2019.08.1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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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교관 호슈는 성실과 신의로 조선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통역사 현덕윤은 일본인을 배려하다 곤장까지 맞았다. 일본이 먼저 성신(誠信)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겠으나, 우리 또한 두 인물의 자취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베박물관 소장일본 에도 시대 중기의 조선 통신사 행렬 모습.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을 두고 통신사(通信使)라고 부른다. 조선 초기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긴 하지만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일본 쇼군의 교체 때 보낸 사신단을 일컫지. 조선으로서는 일본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였고, 일본으로선 조선의 조공 사절로 선전해 막부의 권위를 드높이는 행사이자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어.  

도쿠가와 막부에게 조선 통신사는 최고의 빈객이었단다. 막부는 1년 치 예산보다 많은 돈을 조선 통신사 접대에 쓸어 넣을 때도 있었어. 조선 통신사가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를 지나 에도(도쿄)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일본인이 몰려들어 글씨를 얻고, 시를 받고, 이런저런 문화 교류를 하면서 유행이 바뀔 정도였다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조선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게 있는데 고구마가 대표적이야. 영조 때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조선으로 가져온 거거든.

양국 모두에 굵직한 역사적 흔적을 남긴 조선 통신사지만 전면적인 인적·문화적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했어. 일본인들은 조선 통신사를 쇼군 즉위를 축하하는 ‘이벤트성’ 조공 사절단으로 보았고, 전쟁으로 인해 가슴 깊숙이 적개심을 품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변화와 발전을 목도하면서도 그저 감탄하거나 애써 외면할 뿐이었지. 지피지기, 즉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려는 노력에는 부지런하지 못했던 거야.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신유한이라는 선비가 있어. 그는 1719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의 일행으로서 <해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겨. “높은 양반들은 용모와 거동이 사람 같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 부귀를 누리고 있지만 천박하고 어리석어 모두 흙으로 빚은 우상에 불과한 자들이다. (···) 사람 씀이 이러하고 체통이 이러하고도 부강하고 오랜 안락을 누린다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와 행색과 풍속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폄하와는 별개로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부강하고 오랜 안락을 누리는” 현실에 대해서는 그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끝내버리는 조선 선비의 완강함이 엿보이지 않니.

<해유록>에는 특이한 일본인 하나가 끊임없이 등장한단다.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세 글자의 조선식 이름까지 지닌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였지. 일본 사가현 출신으로 의학과 성리학을 두루 공부하다가 나이 스물둘에 에도에 있던 대마도 번주와 인연을 맺게 돼. 이후 4년 뒤에는 대마도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학자로서 후학을 길러내며 평생을 보낸 사람이야. 그는 조선에 건너와 부산 초량 왜관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썼다고 해. 조선 통신사를 두 번이나 치러낸 호슈는 1711년 조선 통신사의 정사(수석 사신)였던 조태억이 그를 두고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하고 백가의 책을 외운다”라며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영특한 사람이었어.

이 유능한 일본 외교관과 자의식 강한 조선 선비 신유한은 서로 우의를 나누면서도 여러 차례 부딪친다. 대마도주 앞에서 절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렬하게 다퉜던 그들은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칭을 두고 또 한 번 날을 세운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호슈는 신유한에게 왜 조선인들은 일본을 왜(倭)라고 일컫느냐고 따졌고 조선인들이 왜국이니 왜적이니 부르는 것을 일본인들이 불쾌해한다고 지적했어. 신유한은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당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며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터만 봐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더라고 받아쳤지. 호슈는 이렇게 반박해. “그건 그러리라. 하지만 사신의 수행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반드시 왜라 하니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 아랫사람들을 단단히 타일러서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해유록>).” 잊기 어려운 과거를 지녔으나 어쨌든 이웃 나라에 우의를 다지고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이 말끝마다 ‘왜놈’ ‘왜인’ 하고 다녔던 셈이니 외교적 결례라 할 만하지.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무시하고 일본의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편견과 독단이 생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교린제성>)”라고 후배들을 가르친 호슈로서는 작심하고 항의했을 거야.

ⓒ연합뉴스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초상. 조선에 건너와 부산 초량 왜관에 거주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또 한 번 호슈와 통신사들 간의 충돌을 가져온단다. 풍신수길이 지은 절이라고 알려진 호코지 방문 문제였지. 일본인들은 역사서까지 들이대며 그 절이 풍신수길이 아니라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원당이라고 주장했지만 종사관 이명언은 끝까지 방문을 거부했어. 그러자 호슈는 칼을 뺄 듯 흥분하며 조선 통신사들을 압박했다고 해. 이런 일을 겪은 신유한은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호슈를 “위인이 음험하여 겉으로는 말을 꾸미고 안으로는 칼을 품은 자”라고 경계한다. 호슈는 자신의 저서 <교린제성>에서 통신사에게 호코지 방문을 압박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으며 천박한 발상이었다고 반성해. 또 일생 동안 조선과의 관계에서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로써 교류하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을 강력하게 주창했지. ‘성신’을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했어. 호슈는 이렇게 얘기했다는구나. “하인들이 가짜 수염을 달고 다니는 것을 조선은 이상한 짓이라고 여긴다. 조선인이 상중에 소리 내서 우는 것을 일본인이 보면 비웃는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이해의 출발점이다.”

대부분의 조선 통신사들은 일본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지만 성신의 의미에 적극 공감한 이도 있었어. 통역사 현덕윤은 1711년 조선 통신사의 역관으로 호슈를 직접 만나기도 하지. 그는 부산 초량 왜관에 부임한 뒤 일본인들이 머무는 시설이 형편없이 낡은 것을 보고는 사재를 털어 이를 개축했어. 그곳에 성신당(誠信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지. 현덕윤은 초량 왜관 재임 중에 일본인들의 처지를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기도 하지만, 일본인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해 조선 백성이 공적비를 세워줄 정도로 제 소임을 다하는 공직자였어.

그런 현덕윤과 어떤 일본인보다 조선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호슈는 십수 년 만에 부산에서 재회하게 되었어. 현덕윤이 사비를 털어 번듯하게 지은 성신당 앞에서 감격한 호슈는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써 현덕윤에게 주었단다. “경치 좋은 곳에서 경치를 찾지 않고 성신이라 이름한 뜻이 가상하다. 교린(交隣)의 길은 성신에 있고, 지금은 물론 훗날에도 그리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당을 보고 교린의 책임자가 된 사람, 그를 깊이 생각하노라(<국제신문> 2015년 6월2일).”

일본인들을 배려하다가 곤장까지 맞았던 조선인 통역사와 조선을 무시하고 얕보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실과 신의로 조선을 대해야 한다고 외치던 일본인은 아마 그날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시지 않았을까. 아마 그 순간은 성신보다는 배신이, 이해보다는 불신의 기간이 훨씬 길었던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지점으로 남을 것 같구나. 성신의 정신을 먼저 절실하게 회복해야 하는 쪽은 역시 일본이겠으나 우리 또한 현덕윤과 호슈의 자취를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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