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 장정일 (소설가)
  • 호수 561
  • 승인 2018.06.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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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희곡을 읽어온 독자에게 <중국현대희곡총서>는 복음과 같다. 총서를 낸 출판사는 연극 관련 도서를 전문으로 출간해온 연극과인간이며, 이번에 나온 여덟 권은 30권으로 완간될 총서의 1차분이다. 2005~2013년, 중국 관련 전문 출판사인 학고방에서 똑같은 이름의 총서로 라오서·궈모뤄·톈한·샤옌·천바이천·차오위를 차례대로 번역한 바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되기 이전에 대표작을 모두 내어놓았거나 문화대혁명기에 붓을 놓았다.

19세기 말 동아시아 3국(한·중·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대화(서구화)는 압도적일 만치 일방적이고 강제적이었다. 한·중·일은 근대화에 국운을 걸었으며, 그 열망의 차이가 훗날 세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 온갖 전통을 송두리째 버려야 했는데, 그 가운데는 오랫동안 가꾸어온 자신들의 전통 연행(演行)도 있었다. 근대화 초기에 한·중·일은 서구 연극의 영향을 받아 판소리를 창극(唱劇)으로, 경극(京劇)을 문명희(文明戱)로, 가부키를 신파(新派)로 변개시키는 과도기를 거쳤으며, 마지막에는 서구 연극으로 완전한 탈바꿈을 했다.

ⓒ이지영 그림

1886년 8월, 일본 총리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 스에마쓰 겐초는 연극개량회를 발족하고 <연극 개량 취의서>를 발표했다. 연극 개량은 세 가지 목적에 맞춰졌다. 첫째, 종래 연극에 나오는 비윤리적·비현실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중산층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미풍양속을 보여줄 것. 둘째, 배우 중심의 연희성과 진부한 각본을 버리고 서구의 희곡과 같은 언어 중심의 극작품을 생산할 것. 셋째, 근대적인 연극 상연을 위한 프로시니엄 극장(Proscenium Theater)을 세울 것.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끈 서구적 근대화론자들은 ‘국민 만들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전통도 바꾸거나 내버릴 수 있었으며, 연극 개량론자들은 연극의 외형을 서구 기준에 맞추는 동시에 연극을 풍속 교화 수단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중국의 연극 개량 운동은 도쿄의 중국인 유학생이 처음 시작했으며, 그들의 목적 역시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애국 계몽을 통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고 봉건적 유습을 철폐하고자 했던 중국 현대 연극은 1930년 초부터 신중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 빼어난 극작가와 명작을 무수히 쏟아냈다. 같은 시기 한·중·일 3국을 비교해보면, 중국 극작가와 작품의 월등한 양질에 놀라게 된다. 그 저력은 원나라 때부터 자기 이름을 걸고 희곡을 써온 중국 전통 연행의 유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름난 중국 현대문학 개척자 가운데 루쉰은 의식적으로 희곡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쓴 단편소설 <시골 연극>의 서두를 보면 연극 자체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을 헤아려보면 내가 구극(舊劇)을 보았던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러나 두 번 다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나와버렸다.” 루쉰이 연극을 미워한 이유는 또 다른 단편소설 <조리돌리기>에 나와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중국인이 무기력하게 된 원인으로 ‘구경꾼 의식’을 꼽았다. 구경꾼은 사고와 행동을 거부함으로써 수동적이게 된다.

루쉰은 연극이 민중을 몰주체적 방관자로 만드는 것만 근심했지, 연극과 연설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공공매체라는 것을 간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극장은 주의(主義)를 선전하는 곳(버나드 쇼)”이라거나, “극장은 현재 상태(Status Quo)를 무너뜨리는 기관(마틴 에슬린)”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랬다면 루쉰의 희곡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중국 현대사를 10년 동안 암전시킨 문화대혁명(1966년 5월~1976년 10월)의 시발점은 한 편의 연극이다. 1961년 1월, 베이징에서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역사극이 공연됐다. 이 극을 쓴 작가는 베이징 부시장이면서 명대사(明代史) 연구자였던 우한이다. 해서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가 무속과 사치에 빠지자 황제의 잘못을 직언하고 파직당했다. 이후 해서는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의 표상이 되어 여러 경극의 인기 있는 주인공이 되었다. 모택동(마오쩌둥)은 1959년 4월 당 중앙회의에서 처음으로 ‘해서에게 배워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우한은 거기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작품이 상연되자 동시대 중국인들은 가정제를 마오쩌둥으로, 해서를 마오쩌둥이 실패한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팽덕회(펑더화이)로 바꾸어 읽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대약진운동 실패 문제가 격화되자 강청(장칭)과 장춘교(장춘자오)가 문학평론가 요문원(야오원위안)을 시켜 우한의 역사극을 비판하는 평론을 쓰게 하면서 문화대혁명이 불붙었다. 우한은 “우파의 해서와 좌파의 해서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공격받았으며, 마오쩌둥을 비판한 이들은 자본주의를 좇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척결되었다.

페터 한트케의 언어극을 연상케 하는 작품

사인방 몰락으로 문화대혁명의 막이 내리고,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중국 현대 연극이 다시 꽃피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아방가르드 연극의 중국식 표현인 선봉연극 (先鋒演劇)이 있고, 선봉연극의 선두에 훗날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버스 정류장> (민음사, 2002)과 <피안> (연극과인간, 2008)의 극작가 가오싱젠이 있다. 선봉연극은 이념적 선전 도구이자 리얼리즘 일색이었던 중국 연극에 서구의 실험적 연극 수법과 다양한 주제를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가오싱젠의 아방가르드는 오히려 중국 전통의 연극 수법과 도교적이고 선적인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멍징후이 등 지음, 연극과인간 펴냄
연극과인간의 <중국현대희곡총서>는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희곡을 중심으로 홍콩·타이완 등 중국어권 지역의 동시대 희곡도 아울러 소개한다. 이번에 나온 원팡이의 <장 공의 체면>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금기어였던 장개석(장제스)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멍징후이와 그 친구들이 공동 창작한 <워 아이 ×××>는 아무런 유기적 줄거리 없이 “나는 ~을 사랑한다”라는 500~600개의 문구로만 이루어진 실험극으로, 페터 한트케의 언어극을 연상케 한다. 홍콩 출신 정궈웨이가 쓴 <최후의 만찬>은 도박에 빠진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빚보증을 선 끝에 집을 잃게 된 모자가 자살을 준비하는 이야기이다. 이 단순한 작품은 왕자웨이를 비롯한 홍콩 뉴웨이브 영화가 1997년 홍콩 반환에 대한 은유로 해석된 것과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궈스싱의 <물고기 인간>에서는 가오싱젠의 우화적인 작풍이 감지된다. 신문사의 연극 담당 기자였던 궈스싱을 극작가로 인도한 유명 연출가 린자오화가 가오싱젠 전문 연출가였다는 인연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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