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백만 사천이백팔십아홉 가지의 멋진 일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에요.”
한국의 어린이에게 이런 문장을 주어도 될까. 첫 줄을 읽었을 때 든 걱정은 똥푸맨의 ‘또옹또옹’ 발차기에 가뿐히 날아갔다. 이 책의 동화 세 편은 어린이에게 함께 살아가자고 손을 내민다. 세상에는 슬프고 두려운 일들이 있지만 그보다 많은 멋진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같이 가자고. 좋은 동화가 늘 그렇듯이 어른에게도 손을 내민다. 어린이를 잘 보라고, 같이 가자고.
탄이에게 멋진 일은 슬픈 날 일어났다. 학교에서 똥 실수를 하고 화장실에 갇히다시피 했을 때 ‘똥푸맨’을 만난 것이다. 바나나만 한 몸집에 황금빛 똥 근육을 꿀룩거리는 똥푸맨은 ‘슈퍼 히어로들도 출동 전에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똥은 다 똥색이다’라는 딱 부러지는 말로 탄이를 일으켜 세운다. 동화가 일깨우는 직관은 단순하지만 힘이 있다. 〈쿵푸 아니고 똥푸〉는 어린이의 배짱을 두둑하게 만드는 동화다.
〈라면 한 줄〉의 주인공은 한부모 가정의 소녀 시궁쥐 ‘라면 한 줄’이다. 엄마는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쥐덫”이고 라면 한 줄이면 먹고살기 충분하다면서 딸을 단속한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에 뽑힌 ‘라면 한 줄’은 목숨을 건 모험 끝에 무리의 영웅이 된다.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어린이도 그렇다.
〈오, 미지의 택배〉는 세상을 떠난 개를 만나기 위해 심지어 천국에 다녀오는 미지 이야기다. 아홉 살 미지는 택배로 배달된 특별한 운동화를 신고 하늘이 노래지도록 달려서 봉자와 재회한다. 평생의 친구가 떠난 뒤 미지에게는 봉자의 ‘ㅂ’이 ‘눈물 단추’가 되었다. 미지는 인생 첫 택배를 받고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물 단추가 생겼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눈물 단추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훌쩍 자랐을 것이다. 어린이는 성장하고 있지만 미완의 존재가 아니다. 여덟 살은 8년이, 아홉 살은 9년이 평생이고, 매순간이 일생의 가장 성숙한 단계다.
미지는 죽을 만큼 보고 싶은 봉자를 만나고 와서 비로소 ‘사랑할 게 많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 동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벚꽃이 활짝 핀 봄날, 미지가 친구들을 향해 웃으며 걸어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고 또 보게 된다. 글과 그림이 잘 맞아떨어지도록 세심하게 편집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애들’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동료 시민인 어린이를 이해하기 위해, 어른도 함께 이 책을 읽자. 100쪽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이책은 친절하고 재미있다.
-
소녀를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소녀를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김미화 (방송인)
“어제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어.” 책 표지의 이 문구가 나를 잡아끌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이구, 그때 바보같이 내가 왜 ...
-
영국은 없다, 그리고 있다
영국은 없다, 그리고 있다
김세정 (영국 GRM Law 변호사))
어쩌다 보니 영국에 와서 그것도 오래 살고 있다. 공부를 마치면 곧바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니, 길어야 2년 정도 살게 되리라 생각했다. 취직까지 하여 여기서 산 시간이 이제 10년을...
-
그야말로 예리한 ‘집대성’
그야말로 예리한 ‘집대성’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열세 살에 처음으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을 접했다. 가장 먼저 펼친 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니면 〈ABC 살인사건〉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그때까지 읽었던 다른 추리소설이 ...
-
싸워서 이긴 만큼 나아간다
싸워서 이긴 만큼 나아간다
문유석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미국 연방대법원 비사를 다룬 밥 우드워드의 〈The Brethren: Inside the Supreme Court〉(번역서 〈지혜의 아홉 기둥〉) 같은 명저가 ...
-
미래로 띄우는 편지
미래로 띄우는 편지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때로는 표지보다는 띠지가, 제목보다는 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대개 컨텍스트가 텍스트를 압도하기 마련이다. 해직 5년 만에 복귀해서 MBC 파업의 상징이 ...
-
질병을 축하하는 말이라니
질병을 축하하는 말이라니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지난해 이맘때 감기 몸살을 크게 앓았다. 열흘이 지나도 차도가 보이지 않고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져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한쪽 가슴이 뿌옇다. 이물질이 차올라서...
-
장기이식이라는 서사시
장기이식이라는 서사시
박혜진 (문학평론가·문학편집자)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장기이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일을 의학적·심리적·철학적·문학적으로 재구성한 한 편의 훌륭한 서사시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디테일은 장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