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장기이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일을 의학적·심리적·철학적·문학적으로 재구성한 한 편의 훌륭한 서사시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디테일은 장기이식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고, 어렵게 권하는 마음과 불가피하게 수락하는 마음이 충돌하며 합의에 이르는 슬프고 숭고한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수준 높은 심리학이다. 개인의 죽음이 공동체의 죽음으로 전환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철학적 질문들, 그 질문을 드러내는 독창적 구성과 아름다운 언어가 돋보인다.

뇌사 상태에 빠진 소년의 부모에게 의료진은 장기이식을 권유하지만 부모는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장기이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죽음이 오지 않았다. 뛰는 심장, 혈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 소년은 그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그들의 아들이다.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대립 축이다. 죽음을 다룬 어떤 소설도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처럼 대립적인 동시에 역동적이지 않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료진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가족들의 유신론적 세계관이 대립하며 공통 선에 도달하는 과정은 죽음과 삶, 개인과 공동체, 현재와 미래가 벌이는 생사의 변증법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 차이는 언어의 색깔을 통해 구체화된다. 의료진에게 심장은 한시라도 빨리 이식해야 하는 핵심 장기다. 심장에 대해 말할 때 이들의 언어는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반듯하다. 반면 가족들에게 심장은 시간이고 추억이며 그 자체로 아들이다. 심장을 말할 때 이들의 언어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어떤 것도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펴냄
확정하지 않는다. 이쪽 언어에서 저쪽 언어로 넘어갈 때마다 파도가 치듯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마음이 부서진다. 그러나 어떤 쪽으로도 붙어 설 수 없는 이유는,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공공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죽음이 사회의 죽음이 되고 사회의 죽음으로서 다른 개인의 삶으로 재생되는 생명의 순환이 바로 장기이식이다.

탄탄한 취재력과, 그것을 쏟아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처리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이다. 소설가는 무엇보다 다루는 세계의 총체성을 구현해야 한다. 좋은 소설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현실을 재현한다. 그 완벽하게 총체적인 세계를 통해 소설은 현실의 이야기가 되고 문학은 생생한 경험이 되며 우리 영혼은 기어이 그 경험에 자리를 내준다.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아가는 심장의 이동 경로가 마치 내게 일어난 일인 양 영혼의 한 공간에 각인되었다. 이것은 소설의 승리다.

기자명 박혜진 (문학평론가·문학편집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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