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디플레이션 공포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 임금 올려 디플레이션 해결하자”
 

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통화정책 지고 재정정책 뜰까
 

‘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지난 2월 한국의 수출액은 364억 달러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2%나 줄었다(산업통상자원부 발표). 이런 추세가 지난해 1월 이후 14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수출 부문이 무서운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전망도 어둡다. 더욱이 이 같은 현상이 순전히 한국 내부 요인(기업·노동자·정치 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글로벌 경제의 전반적 침체를 가장 큰 원인으로 봐야 한다.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라는 중병에 걸렸던 글로벌 경제가 그동안 조금씩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연합(EU)과 일본 경제는 파격적인 경기부양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가장 회복세가 뚜렷한 것으로 간주되던 미국 역시 지난해 4분기부터 경제성장률이 정체된 상태다. 중국 세관이 3월8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2월 수출실적은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20.6%나 떨어졌다. 세계 경제위기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세계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던 러시아·브라질 등의 이머징마켓에서는 원자재 가격의 폭락에 따른 성장률 지체는 물론이고 외자 유출로 인한 금융위기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경제가 결국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절망과 공포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물가 인하는 반가운 일인 듯하다. 그러나 경제 전반적으로는 악재 중 악재다. 오늘 1억원인 기계설비가 다음 달에 9000만원으로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면, 기업 측은 투자를 뒤로 미룰 것이다. 소비자들 역시 지금 100만원인 TV 가격이 다음 달에 90만원으로 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면 TV 구입을 연기할 것이다. 모든 경제주체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경제 전반에서 기업은 투자를 꺼리고 가계는 소비하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누구도 자신의 생산품이나 서비스를 팔아 돈을 벌기 어렵게 된다. 일단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기도 쉽지 않다.

 


그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디플레이션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물가를 올리기(인플레이션) 위해 나름 과격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당초에는 기준금리를 0%로 내렸다. 금리 인하는 전통적인 불황 대책이다. 성과가 없었다. 그다음에는 대규모 양적완화로 통화 공급(본원통화)을 이전의 3~4배까지 확장했다.

양적완화는 비전통적(unconventional) 통화정책으로 불려왔다.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으로 일반은행의 보유 채권을 대량 매입한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채권을, 일반은행은 돈을 갖게 된다. 이처럼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직접 돈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적완화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불린다.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일반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긴 보유금에 대한 금리를 조금씩 올리거나 내리는 정도다.

이처럼 파격적인 방법(양적완화)을 통해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가인상률 2% 달성’을 목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큰 효과는 없었다. 물가인상률이 잠시 2% 벽을 뚫고 올라가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해 힘을 잃고 이전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OECD가 조사한 각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자료에 따르면, 양적완화가 시행된 이후 미국·유로존·영국 등 주요국의 연간 물가인상률은 2011년 정점에 오른 뒤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지난해는 세 지역 모두 사실상 0%를 기록했다. 2013년에 양적완화를 시행한 일본은 이듬해인 2014년에 연간 물가인상률 2.7%를 달성했다. 그러나 ‘드디어 물가가 오른다’라는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일본의 연간 물가인상률은 다시 0.8%로 급락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올해나 내년 사이 세계경제는 전반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전락할 수 있다. OECD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세계경제는 2015년보다 2016년에 더 느리게 성장할 전망이다. 지난 5년을 통틀어 현재의 성장 속도가 가장 느리다”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금리를 내리고 돈을 뿌려도 경기를 자극할 수 없고, 물가도 올라가지 않는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존 불황 대책들

물론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뚫고 나갈 방법은 있는 법이다. 그런데 현 국면에서는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사용해버렸기 때문이다.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준금리는 이미 수년 동안 0%였으므로 더 이상 내리기도 힘들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은 지난해 12월 비로소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으나 이후 글로벌 불황이 더욱 심화되고 자국 경기도 침체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어서 계속 금리를 인상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양적완화 역시 불황 극복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 갈수록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어떤 나라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비전통적인 정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것도 진보 좌파 경제학자들이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중앙은행에서 고위직을 지내는 등 주류의 길을 걸어온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예전 같으면 ‘황당하다’고 평가받을 정책 수단들을 내놓고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실험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이너스 금리 제도다(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기사 참조). 2014년부터 EU와 유럽의 다른 소국들에서 시행되더니, 최근에는 일본은행(일본의 중앙은행)에까지 도입되었다. 중앙은행이 자행에 예치된 일반은행의 보유금(reserve)에 대해 수수료를 받는 제도다. 비록 중앙은행과 일반은행 간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돈을 맡기고 이자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금융 원리를 완전히 전복하는 제도다. 일반은행에 ‘중앙은행 계정에 돈을 넣어두지 말고 실물경제에 대출하라’는 노골적인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행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금기 사항으로 간주되어온 ‘재정정책’을 복권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통화정책 지고 재정정책 뜰까 기사 참조).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의 보유금을 늘려주는 양적완화가 아니라 기업과 가계에 직접 돈을 줘야 한다는 ‘헬리콥터 머니’ 역시 대안적 통화정책으로 제기되고 있다(‘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기사 참조). 한편 1970년대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던 ‘소득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촉진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흐름도 흥미롭다(“노동자 임금 올려 디플레이션 해결하자” 기사 참조).

2016년 3월 현재, 세계경제가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떨어질 위험이 크다는 데는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듯하다. 명백한 것은, 기존의 불황 대책 중 상당수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국면에서 더 이상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새로운 틀의 대안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점이 그나마 희망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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