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공포] ‘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 이종태 기자
  • 호수 445
  • 승인 2016.03.31 0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황의 가장 전통적인 정책 수단은 금리 인하다. 하지만 이미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이라서 더 내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을 더 찍어서 나눠주면 된다. 헬리콥터 머니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제안해온 정책이다.

[특집] 디플레이션 공포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 임금 올려 디플레이션 해결하자”
 

통화정책의 최종 버전, 마이너스 금리
 

통화정책 지고 재정정책 뜰까
 

‘헬리콥터 머니’가 주목받는 이유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경제 문제가 있다면, 단연 ‘수요 부족’이다. 기업이 아무리 좋은 상품을 생산해도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불황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정책 수단은 금리 인하다.

이미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이라서 더 내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삽시간에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 있긴 하다. 중앙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 기업과 가계에 나눠주면 된다. 자유시장경제론의 대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이미 1969년 한 논문에서 ‘헬리콥터 머니’라는 우화를 제시한 바 있다.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헬리콥터에 지폐를 잔뜩 싣고 마을 상공에서 뿌리는 광경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벤 버냉키 전 의장 역시 지난 세계 금융위기 당시 헬리콥터 머니를 ‘세금 환급(tax rebate)’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가 시민들 각각에게 세금 환급 명목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면, 중앙은행은 그 액수만큼 돈을 찍어 정부에 주면 된다. 최근엔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OE·영란은행) 통화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윌럼 뷰이터(현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이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얼핏 듣기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지만, 세계적으로 쟁쟁한 주류 경제학자들이 제안해온 정책인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수요 부족이다. 위는 한 대형마트의 특가 코너.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로부터 돈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헬리콥터 머니가 왜 새로운 아이디어인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덧붙이자면 실업급여, 의료보험 급여 등 시민들이 ‘정부’에서 받는 돈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부(입법·사법·행정) 가운데서도 행정부에서 나온다.

따지고 보면, 돈을 발행하는 중앙은행 역시 ‘광의의 정부’에 속한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같은 정부에 속하는 행정부에 그냥 넘겨주면 안 되나. 같은 정부끼리인데 뭐 어때? 결코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는 행정부와 중앙은행의 살림살이를 엄격히 따로 꾸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나 돈에 굶주린 행정부가 그때마다 중앙은행에 ‘명령’해서 돈을 갖고 오게 하면, 자칫 돈이 너무 많이 발행되어 돈의 가치를 지나치게 떨어뜨릴 수 있다(하이퍼 인플레이션). 그래서 원칙적으로 행정부와 중앙은행은 돈거래를 할 수 없다.

행정부가 돈(재정)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금이고 다른 하나는 빌리는 것이다. 예컨대 100억원 상당의 국채를 민간 부문에 팔면 된다(민간으로부터 100억원을 빌리는 셈). 그러나 행정부는 국채를 중앙은행에 매각(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돈을 빌리는 것)할 수는 없다. 자칫 중앙은행이 행정부의 사금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중앙은행의 (정부로부터) 독립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 중 대부분은 일반은행으로 인수된다. 그런 다음 대출 등을 통해 민간 부문에서 확산된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에 돈을 그냥 주지는 않는다. 예컨대 돈을 제공하면 그에 상당하는 증권을 받는 식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은 중앙은행의 부채로 간주된다. 당신이 가진 1만원짜리 지폐는 한국은행이 당신에게 1만원 상당의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은 1만원을 일반은행에 넘길 때 그 가치에 상당하는 물품(예컨대 채권)을 받아 ‘자산’으로 보유해야 한다. 그래야 빚과 자산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만약 빚이 자산보다 많아진다면, 중앙은행 역시 회계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양적완화의 경우에도, 중앙은행은 일반은행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대신 그 은행 소유의 채권을 인수했다. 이에 반해, 중앙은행이 시민들에게 직접 돈을 주는(설사 행정부를 경유한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헬리콥터 머니의 경우, 중앙은행이 자산으로 받는 것 없이 부채(돈)만 늘리는 경우가 된다.

양적완화와 헬리콥터 머니의 차이점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양적완화가 시작되던 2010년 전후, 언론은 양적완화를 헬리콥터 머니에 비유하기도 했다. 두 정책 모두 ‘민간’에 돈을 뿌리는 것이므로 비슷한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양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헬리콥터 머니’는 중앙은행에서 새로 발행한 돈이 시민들에게 바로 전달되는 형식의 경기부양책이다.

양적완화의 경우, 중앙은행의 돈을 받는 주체는 일반은행이다. 이 덕분에 일반은행의 보유금(일반은행이 중앙은행에 갖고 있는 계정 내의 돈)이 크게 늘어난다. 양적완화 입안자들은 일반은행의 보유금이 크게 증가하면서 민간 실물경제로 넘쳐흘러(trickle down) 경기 부양에 기여하기를 기대했다. 말하자면, 양적완화는 은행을 통해 실물경제에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된 정책이다.

이에 비해 헬리콥터 머니는 실물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중앙은행이 새로 발행한 돈이 시민들의 지갑이나 계좌에 바로 꽂히기 때문이다. 세금 환급처럼 행정부를 통해 배분되어도 마찬가지다. 양적완화와 달리 중간에 금융기관이 끼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헬리콥터 머니는 ‘시민에 대한 양적완화(QE for the people)’로 불리기도 한다. 더욱이 ‘이렇게 돈이 뿌려지니 곧 물가가 오르겠군’ 하는 기대를 민간에 심어줄 수도 있다. 디플레이션의 경우와 정반대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투자와 소비를 앞당기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제주체가 투자와 소비를 서두르면 실제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될 수도 있다. 영국 브라운 대학 마크 블라이스 교수 등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가디언> 2015년 5월21일) ‘가계에 대한 현금 이전’, 즉 헬리콥터 머니가 수요에 주는 영향은 양적완화보다 훨씬 크다. 가계는 헬리콥터 머니처럼 ‘횡재로 생긴 돈(windfall)’에 대해서는 3분의 1 내지 2분의 1을 바로 소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GDP의 3% 정도를 헬리콥터 머니 방식으로 가계에 지급하면, GDP가 1~1.5% 정도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비해 영국 GDP의 20% 정도인 양적완화는 GDP 성장에 3% 정도 기여한 것으로 잉글랜드 은행은 본다. 양적완화로 발행한 돈을 헬리콥터 머니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직접 지급했다면, 7~10% 정도의 GDP 성장이 가능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이에 따라 마크 블라이스 교수 등은 “중앙은행이 가계 부문에 직접 현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헬리콥터 머니는 현대 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전복할 수도 있는 주장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분리라는 철칙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빚과 자산을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재무구조에도 위협적이다. 더욱이 재정정책인지 통화정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이 곧바로 정부 지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인 클라이브 크룩은 <블룸버그>(2015년 5월31일) 기고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반적인 통화정책은 이미 무력한 형편이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간의 잡종(헬리콥터 머니)’ 없이 ‘물가인상률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은행의 독립성 역시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성취할 수단이 있을 때만 말이 되는 이야기다.”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