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6일 오후 1시42분. 기자들에게 일제히 문자가 떴다. “금태섭 변호사입니다. 언론에 설명할 내용이 있어 오늘(6일) 오후 3시 프레스센터 20층 프레스클럽에서 만나뵙고자 합니다.” “뭐지?” 대부분 최근 며칠 사이에 쏟아져나온 안철수 원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전세살이, 포스코 스톡옵션 행사, 포스코 사외이사 시절의 행적 등)에 대한 해명 자리일 거라고 짐작했다. 

일각에서는 “출마 여부와 관련한 것 아니냐”라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한 언론사 기자는 ‘출마’ ‘불출마’ 두 가지 경우의 기사를 초벌로 써 들고 서울 태평로 프레스클럽에 나타났다. 마침 그 시간은 민주통합당 경선의 최대 승부처라고 할 수 있는 광주·전남 경선의 후보자 연설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시사IN 자료

 


금태섭·송호창·조광희·강인철 변호사 4명이 나란히 들어설 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내용은 놀라웠다. 금 변호사는 “9월4일 오전 7시57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대선기획단 정준길 공보위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철수 원장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뇌물과 여자 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라고 말했다. 

정준길씨가 거론했다는 ‘뇌물과 여자 문제’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밝혔다. 뇌물 건은 ‘안랩(옛 안철수연구소) 설립 초창기인 1999년 산업은행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는데 그와 관련하여 투자팀장인 강모씨에게 주식 뇌물을 공여했다’는 내용이고, 여자 건은 ‘안 원장이 목동에 거주하는 음대 출신의 30대 여성과 최근까지 사귀고 있었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 변호사는 “최근 언론에 보도된 경찰의 안철수 원장에 대한 사찰 논란 및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알고 있다’는 정준길씨의 언동에 비추어, 정보기관 또는 사정기관의 조직적인 뒷조사가 이뤄지고 그 내용이 새누리당 측에 전달되고 있지 않느냐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라고 마지막 어퍼컷을 날렸다. 


내용 발표 직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은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통화 내용을 녹취한 게 있나.”

“없다. 하지만 이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화요일 상황을 왜 목요일에야 밝히나?”

“여러 사람과 상의하고 많이 고민했다.”

“안철수 원장 반응은?”

“4일 아침에 말씀드리니 ‘정말인가요?’라고 물었다. 사실 확인 작업을 했고 오늘 오전에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더니 별말씀 없었다.”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할 건가?”

“상의해보고 추후에 결정하겠다.”

‘뇌물과 여자 문제’에 대해 더 캐묻거나 ‘출마 여부’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할 여지가 없이 10여 분 만에 기자회견이 끝났다. 

 

 

 

 

ⓒ뉴시스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대변인인 금태섭 변호사가 9월6일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철수식 출마 선언, 혹은 상황 반전

이 과정을 생방송을 통해 지켜본 정치권 인사들은 “안철수 원장이 드디어 링 위에 올랐다”라고 입을 모았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금통위원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이튿날 트위터에 “박근혜·새누리 협박전화 받고 안 나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아예 대못을 박았다. “왜 하필이면 민주당 전당대회 시간이냐”라며 툴툴대던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출마 선언도 참 희한하게 한다. 저것도 안철수식이냐?”라며 연신 실룩거렸다.  

민주당이 못마땅해하든 말든 이번 ‘불출마 협박’ 폭로는 대선 103일을 앞두고 전체 대선판을 크게 출렁이게 만드는 변곡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당장 두 갈래로 수세에 몰리던 안철수 원장이 공세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안 원장이 정치권에 핵심 변수로 등장하기 시작한 게 딱 1년 전이다. 2011년 9월 ‘서울시장 출마설’이 보도되고 50% 안팎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안 원장은 순식간에 대선주자급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이후로 내내 ‘피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박원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서울시장 출마를 접었고, 2012년 총선에 ‘나오라’ ‘나오라’ 하는데도 비켜갔고, 〈안철수의 생각〉 발간을 전후로 대선 출마에 대한 지지층의 요구가 폭발적인데도 여전히 견해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안 원장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얘기가 거듭될수록 지지층에서조차 ‘너무 잰다’라며 짜증이 생겨나던 터였다.

그 와중에 ‘최태원 구명 탄원서 서명’ ‘재벌 2, 3세와의 V소사이어티 활동’ ‘룸살롱 출입 논란’ ‘아파트 딱지 구매 의혹’ ‘포스코 스톡옵션 행사’ 따위 그를 둘러싼 논란과 안 원장 측의 해명을 보며 사람들 사이에 점차 ‘안철수=CEO=착한 이명박’이란 이미지가 형성되던 참이었다. 새누리당의 한 인사는 “강남 전세가 무슨 서민의 아픔을 알겠느냐. 부잣집에서 자라 승승장구한 안 원장의 서민 코스프레가 행적이 드러날수록 들통날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지율도 여론의 짜증을 감지했다. 폭로 직전에 나온 리얼미터 조사(9월4~5일)에서는 안철수 원장의 다자 구도 지지율이 22.9%까지 하락했다.

그런데 이번 ‘협박’ 폭로로 상황이 180도 반전됐다. 안 원장이 의외의 지점에서 박근혜 후보 측을 한 방 세게 때림으로써 지지층의 짜증을 일거에 날린 데다, 금태섭 변호사나 송호창 민주당 의원이 ‘협박’을 넘어 ‘사찰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안 원장이 ‘착한 MB’에서 ‘사찰 피해자’로 자리바꿈한 것이다.

특히 ‘검증’을 ‘사찰과 협박’으로 프레임 전환하는 전략은 두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먼저 야권의 지지 확보다. 당초 송호창 의원의 기자회견 참석을 두고 민주당은 물론 기자들 사이에서도 고깝게 보는 기류가 강했다. “아무리 안철수 원장과 친하다지만 민주당 의원이, 그것도 경선 선관위원을 맡고 있는 그가 광주·전남 경선이 열리는 시각에 안 원장 측 기자회견에 나오는 게 맞느냐”라는 시각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송 의원은 자신이 친분관계 때문이 아니라 민주당의 민간인 불법사찰 진상조사특위 위원의 자격으로 참석했음을 애써 강조했다. 그러면서 “안 원장을 죽이겠다고까지 협박한 근거가 되는 내용들은 정보기관이나 국가기관의 철저한 사찰에 의하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 시절에 중앙정보부가 했던 정치인 사찰과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일들이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19대 국회에서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한 진상규명을 할 때 안 원장 사건도 포함해 조사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뉴시스안철수 원장 측에 뇌물과 여자 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당사자로 지목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대선기획단 정준길 공보위원이 9월6일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정론관에 들어서고 있다.

 

 

송 의원은 이명박-박근혜 짬짜미 의혹까지 제기했다. “박근혜 후보가 안 원장에 대한 뒷조사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 이명박 대통령과 두 시간 독대하면서 그런 얘기가 오갔는지 직접 해명하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안 그래도 지난 9월2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가 독대한 것을 놓고 ‘정권 재창출을 위한 밀약’이니 ‘선거법 위반’이니 하며 야권의 비판이 거세던 참이었는데, 거기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다. 

이처럼 안철수 ‘검증’이 여권의 ‘공작정치와 사찰’로 틀이 바뀌고, 그것을 자기 당 의원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자 민주당도 발을 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안철수가 민주당 경선을 망쳤다”라고 비판하던 민주당은 다음 날(9월7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새누리당 정치공작을 위한 이명박 정권 불법사찰 진상조사위’를 구성하고 우윤근 의원을 위원장으로, 송호창 의원을 간사로 임명했다(안철수, 타이밍 감각 기막히네  기사 참조).  

그러나 ‘사찰’ 프레임의 확산을 통해 안 원장 측이 얻은 가장 큰 효과는 유권자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져가던 ‘유신의 악몽’을 끄집어낸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의 공식 후보가 된 후 곧바로 ‘100% 대한민국’을 앞세워 이른바 ‘통합 행보’를 하고 있다. 

자신의 최대 취약점으로 꼽히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대중·전태일 등 유신 피해자들에 대한 ‘방문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박 후보가 9월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을 방문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행보는 ‘진정성 없는 보여주기 정치’라는 야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중도층을 공략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 캠프 쪽 인사가 지지율 1위의 야권 주자에게 출마하지 말라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그 이유로 댄 것들이 ‘공작정치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박근혜=유신공주’라는 이미지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한 시사평론가는 “때마침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까지 재조명되고 있는 터라 박근혜 후보에게는 상황이 더 불리해졌다. ‘박정희 대 장준하’ ‘유신 대 저항’ ‘공작정치 대 투옥·사형’ 등이 오버랩되면서 ‘독재자의 딸 박근혜 대 사찰 피해자 안철수’라는 굵직한 프레임이 만들어졌다”라고 진단했다.

물론 이번 폭로전의 여운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각에서는 주말을 지내면서 곧바로 ‘약발’이 떨어지리라고 본다. 새누리당이 정준길 공보위원을 곧바로 사퇴시키며 꼬리 자르기에 나섰고, 박근혜 후보까지 나서 “친구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라며 폭로자를 ‘비정한 친구’로 몰아가고 있다(새누리당의 발빼기, 빠름~빠름~  기사 참조). 

보수 언론은 ‘협박’이나 ‘사찰’을 양측의 진실게임으로 의미를 축소하는 대신, ‘안철수 검증’ 쪽으로 다시 한번 물꼬를 돌릴 기세다. 〈조선일보〉는 아예 첫 보도부터 1면 톱이 아닌 사이드로 다루면서 ‘진실 공방’에 초점을 맞췄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런 뉴스가 11월에 나왔으면 모를까 지금은 판세를 흔들기에는 너무 이르다”라고 말했다. 야권의 한 전략통은 “며칠 지나고 나면 결국 사람들 머리에 남는 건 ‘안철수의 여자’뿐일 거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웬만한 검증 먹히지 않을 것

하지만 친안철수 인사들은 일단 ‘프레임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에 지지층의 이완을 막을 수 있고, 앞으로 나올 웬만한 검증은 잘 먹히지도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 중도 성향의 한 40대 주부는 “새누리당이 그렇죠 뭐. 당연히 사찰했겠죠”라고 지레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번 폭로를 계기로 제2, 제3의 폭로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동안 입을 닫은 채 눈치만 보고 있던 인사들의 제보가 야권 유력 주자 쪽으로 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 최재천 의원이 9월6일 대정부 질문에서 폭로한 ‘묵우회’(이명박 정부 장관 보좌관들의 모임)의 존재와 공작정치 의혹도 내부 고발자의 제보에 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래저래 이번 ‘폭로’가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계산서가 나온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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