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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막힌 세기의 재판, 판·검사는 승승장구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된 ‘학림 사건’ 관계자 이선근씨를 만났다. 그는 고문에 대해 묻자 잠시 말을 멈췄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2012년 07월 05일 목요일 제2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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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주변 공기가 긴장하는 듯했다. 1981년 6월 중순의 기억,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던 일에 대해 묻자 이선근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대표는 잠시 침묵했다. 만감이 교차한 듯했다. “들어가자마자 10여 명에게 둘러싸여 구타를 당했다. 발길질에 몸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사람 몸이 이럴 수가 있구나 싶었다.” 물고문, 전기고문이 이어졌다. 수사관이 추궁했다. “너 빨갱이지? 조직 내놔, 조직 내놔.” 끔찍한 한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와 이태복 전 장관 등이 함께했던 전민노련, 전민학련은 반국가단체로 둔갑했다. 25명이 징역 2년형에서 무기징역까지 받았다. 그리고 정확히 31년이 흐른 지난 6월15일, 대법원은 이 ‘학림 사건’ 관계자 24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1명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2009년 기자회견을 하는 이태복ㆍ이선근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청년 이선근’은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이었다.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하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제적생에 대한 복학조치로 다시 학교로 돌아온 때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부상하던 시기. 상황은 암울했다. 그는 ‘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말고 사태를 살펴보자’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에 비판적이었다. 대학생 시위대 십수만 명이 모였으나 해산했던 ‘서울역 회군(1980년 5월15일)’과 곧이어 터진 ‘5·18 광주’는 충격이었다. 그는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구상했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각 대학 학생들을 모아 ‘세미나’를 진행했다. 제적 당시 편집장으로 근무했던 광민사 이태복 사장에게 의견을 구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고민했다.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건설하는 데 이선근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나중에 학생들이 노동 현장으로 갈 때 이태복이 주도했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의 지도를 받기로 합의했다. 당시 전민노련은 ‘노동3권 쟁취,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요구’를 활동 방향으로 삼았다.

그리고 1981년 2월 여러 대학 학생들과 함께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결성했다. 회칙에 학원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목적을 둔다고 밝혔다. 군사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조직원이 조직 전체를 알 수 없도록 점조직·비밀주의 방식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경찰은 이미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다. 경찰은 당시 광민사 아래층에 한 달 동안 사무실까지 얻어놓고 이들을 미행하고 도청했다. 그리고 1981년 6월, 민주화 시위가 폭증하자 경찰이 일제 검거에 나섰다. 전민학련·전민노련과 관련해 26명이 구속되었고, 수사를 받은 뒤 수백 명이 징집당했다. 경찰은 전해에 있었던 ‘무림(霧林) 사건’에 대비해 이 사건을 ‘학림(學林) 사건’이라 이름 붙였다(무림은 ‘안개처럼 조직을 종잡을 수 없는 조직’이라는 뜻으로, 학림은 ‘학생들의 조직’이라는 뜻으로 명명했다). 구타와 고문을 통한 수사는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만들어버렸다. 이선근 대표는 “전민학련은 규약 어디에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없었다. 흥사단 아카데미 학생들을 중심으로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다른 민주화운동 단체가 출현할까 두려워 억지로 반국가단체에 끼워 맞췄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1988년 이태복(가운데)씨의 석방 환영회.


“고문의 기억, 사회가 가져가라”


이선근 대표가 기억하는 당시 재판은 ‘이상한 재판’이었다. 검찰은 진술이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검사는 안강민(전 서울지검장·18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김경한(전 법무부 장관), 임휘윤(전 서울지검장) 등이었다. 이 대표는 “반국가단체라고는 해놓았는데, 증거물이 우리가 갖고 있던 책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영국 역사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이었다. 책이 증거가 되는지 아닌지 논란이 되었다. 감정인으로 당시 서울대 상대 임종철 교수가 ‘용기를 내어’ 나섰다. “다카하시 고하치로라는 도쿄 대학 교수의 책이 있었다. 검찰이 좌익 책이라고 했는데, 임 교수가 ‘그 사람, 우익 인사다’라고 증언했다. 재판 분위기가 바뀌었다.” 1심에서는 이 책들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태복에게는 사형이, 이선근에게는 무기징역이 구형되었다.

그러다가 2심에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2심 재판부는 최종영(전 대법원장), 이강국(헌법재판소장), 황우여(새누리당 대표) 판사였다. 이선근 대표는 “2심에 기대를 했는데, 2심에서 그 책들이 결국 증거로 채택되었다. E. H. 카의 책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가, 영국 대사관의 항의를 받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태복 전 장관은 “재판받을 때,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말했지만, 판사들은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태복 전 장관은 무기징역을, 이선근 대표는 징역 7년을 선고받는 등 2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한매일
1975년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사형 집행 뒤 울부짖는 유가족들.
무죄가 확정된 이선근 대표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해야 한다. 얼마 전부터는 마음에 남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학림 사건 이전에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에 대해서도 재심을 청구해놓은 상황이다. 그는 “그 당시 검사들은 승승장구했고, 판사들은 그 시절 판결에 대해 말이 없다. 우리 같은 시국 사건뿐만 아니라 정권이 민사재판에도 개입해 억울한 피해를 입은 이가 많은데…”라고 말했다.

이번에 학림 사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엄주웅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는 인터넷 언론 <진실의 길>에 ‘내가 겪은 학림 사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어머니는 16년 전에 우울증으로 돌아가셨다. 둘째 아들 빼내겠다고 굿 빼놓고는 안 해본 일이 없었고 외국 제쳐놓고는 안 가본 데가 없었다. 그분 말년을 괴롭힌 악성 관절염은 순전히 나로 인한 것, 아니 저 우악스러운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온 다음 날 나는 어머니 무덤에 갔다. 서러운 기억은 이제 다 날려보낼 테니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아픈 기억은 내게서 해방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정말로 잊을 것이다. 기억이 멈추는 곳 치후아타네요(영화 <쇼생크 탈출> 엔딩에 나오는 지명)에는 못 가도, 아무런 회한 없이 남영동에도 가보고 (서대문구치소가 있던) 서대문에도 가보리라. 그 대신 나를 포함한 ‘학림 사건’ 스물여섯 명의 기억은 사회가 가져가길 바란다. 그리고 잊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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