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당시의 체험을 기록한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항시 죽음에 직면하는 수용소 내의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거기에도 모범생이 있다. 이들은 명령에 따라 열심히 일한다. 게으름 피우기는 그들의 사전에 없다. 수용소에서는 남의 물건 훔치기가 다반사로 일어나지만, 이들은 남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죽음이다. 하루에 쌀뜨물 같은 죽 한두 사발과 빵 한두 조각으로는 고된 노동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진이 빠져 병들고, 노역불능자로 분류되어 가스실에서 삶이 종결된다.

배경 좋은 이들도 있다. 음악가는 나치 장교를 위해 연주하는 대가로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다.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였기에 힘이 덜 드는 화학실험실에 배치되었다가 살아남는다.

요령이 좋은 자도 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꾀부리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특별한 기회가 왔을 때 감시자 앞에서 확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강한 인상을 남긴다. 물론 이들도 점점 좋은 대우를 받게 되고 상당수가 살아남는다.


모범 사병이 왕따 중의 왕따가 된다면…

겉모습, 즉 옷과 몸을 잘 관리해서 감시자에게 잘 보이는 이도 있다. 면도도 자주 하고 줄무늬 죄수복과 셔츠도 어떤 수를 써서든 깨끗하게 빨아 입는다. 수용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고, 감시자의 눈에 띄어 조금 편하게 지내게 된다. 이들도 살아남을 확률은 높다.

우리 군에서 최근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접했을 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레비의 체험 기록이었다. 우리 군에도 배경 좋은 군인, 요령 좋은 군인, 외모 관리 군인, 모범 군인이 있을 것이다. 배경 좋은 사병은 상대적으로 편한 곳에 배치되어서 군 생활을 하다가 제대할 것이다. 요령 좋은 사병과 외모 관리 사병도 어디에 배치되든 적당히 꾀부리면서 군 생활을 하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모범 사병은 규칙을 준수하며 명령에 따라 열심히 군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군 생활은 아우슈비츠의 모범생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순탄치 않을 것 같다. 규칙은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상급자의 ‘괴상한’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에 대해 고발이나 폭로를 할 것이다. 필요할 때에는 물론 자기 권리도 주장할 것이다. 결과는 언론 보도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더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왕따’ 중의 ‘왕따’가 될 것이다. 그래도 그들 대다수는 군 생활이 2년이면 끝나기 때문에,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견디다가 제대할 것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모범생들은 그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자살이나 사고는 규칙이나 의무를 위반할 줄 모르기에 도망치지도 못하는 이들 모범 군인이 고통을 자기 안에서 더 이상 삭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선택하게 되는 유일한 해방 수단일지 모른다.

제대 군인들은 종종 군대 체험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대체로 무용담이다. 강화도 사고가 난 후에도 이들의 증언이 쏟아져나왔다. 이번에는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어둡고 음침한 면도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그러나 레비는 말한다. “진짜 증인은 살아남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의무를 지키지 않아서 또는 요령 피우기에 능하거나 운이 좋아서 심연의 가장 깊은 지점을 건드리지 않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건드린 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기에 증언하지 못한다. 돌아온다고 해도 이들은 입을 열지 못한다.”

레비는 수용소에서 죽어간 모범생들에게 깊은 연민과 죄책감을 느낀다. 체험기는 이러한 내면 상태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죽은 자들 앞에서는 그것도 의미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살한 어느 병사의 아버지는 그래도 참고 견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아들은 편지봉투를 뜯어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 레비의 체험기 원제는 ‘만일 이것이 인간이라면’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 군대라면’ 나는 몇 년 뒤 군에 가 있을 내 아들에게 어떤 편지를 보내게 될까?

기자명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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