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은 군대에서 정신질환을 얻어왔다. 행동이 느리고 어눌해 선임병들이 총기 관물대에 하루 동안 가둬두었다고 한다. 이후로 폐소공포증을 앓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극장에 가지 못한다. 그는 ‘관심 사병’이었다.

강화도 해안 소초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으로 해병대원 4명이 숨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청년들이다. 눈물의 영결식이 열렸다. 해병대 사령부는 고인들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목숨 값이다. 흔히들 군대에서 죽으면 개 값도 나오지 않는 개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개죽음은 서둘러 급조된 서푼짜리 명예와 교환되었다.

뉴스를 보았다. 이번 사건이 관심 사병, 부대 부적응자의 소행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있었다. 군내 관심 사병의 통계를 밝혀가며 제대로 된 관리가 시급하다는 대목에서는 흡사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 중이니 조심하라는 재난 방송을 듣는 것 같았다. 반면 같은 부대에서 ‘기수 열외’ 따위 가혹행위를 당하고 정신질환을 얻어 법원으로부터 국가유공자 판정을 받은 사람에 대한 보도는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한국 군대 조직은 항체가 만들어질 수 없는 바이러스

한국의 군대 조직은 그 자체로 이미 방 안의 코끼리이고 항체가 만들어질 수 없는 바이러스다. 병적 위계와 폭력적인 의식체계를 배워나가는 남한 남성의 필수 사회교육기관이다. 필요에 의한 살인을 가르치는 곳이다. 젊은이를 애국과 의무의 이름으로 저렴하게 착취하며 병증과 굴종과 비합리로 유지하는 공간이다. 세상은 한국 군대라는 비정상 안에서 정상인으로 잘 버텨내며 그 안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셔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을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관심 사병이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 군대라는 맥락 안에 있으면서 관심 사병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근대 이후의 세계를 살아나가기에 지나치게 둔감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군대에서 간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알아서 조용히 잘 굴러가는 것’이다. 사병들은 부대를 알아서 조용히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자체적인 폭력을 재생산한다.

집합시키고 집합당하고 때리고 맞고 억울해하고 억울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한다. 알아서 조용히 잘 굴러가는 것을 원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눈에 띄게 분노하고 책망한다. 그렇게 두 명의 관심 사병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한국의 군대는 주변부의 죽음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도발하게 만든다. 그곳에 우리는 꾸역꾸역 아들과 형제와 친구들을 밀어넣고 있다. ‘남자가 되어 돌아와라’는 말을 남기며.

한국 군대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대체 한국에서 지킬 것을 지키고, 보고 들을 것을 빼놓지 않아가며 사회 부적응자 혹은 ‘관심 국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나. 그런 부적응자 가운데 적응하고 싶지 않고 섞이고 싶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다는 이유로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얻는다. 그리고 사건이 생기면 책임을 강요당한다.

적응하고 싶다. 섞이고 싶다. 불만을 가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이 세상 아래서 웃는 것이다. 외교통상부 차관이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2018 평창은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입니다. 이걸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우리 국민이 아니지요^^ 대한민국 국민 파이팅!” 우리는 다시 한번 따돌려졌다. 부적응자들의 지옥에서, 우리는 따돌림당하고 있다.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