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장갑을 끼더니 손에 빨간 물감을 듬뿍 묻혔다. 그 빨간 손들이 사람 이름이 적힌 흰 널빤지들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김만수 부천시장, 안병용 의정부시장, 박영순 구리시장…. 널빤지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뉴타운 사업이 추진되는 경기도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다. 유독 물감 세례를 진하게 받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널빤지 앞에서 한 주민이 향불을 피우며 소리쳤다. “뉴타운 중단 안 한다는 김문수, 오늘 제사 지내자!”

5월3일, 경기 수원 경기도청 앞에서 열린 뉴타운 재개발 반대 집회는 꽤 과격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도청을 향해 “이 김정일보다 나쁜 놈들아!”라고 소리 지르고, 도청 앞을 막은 전경 대열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이렇게 악에 받쳐 뉴타운 반대 집회에 나선 이들은 뉴타운 사업으로 쫓겨나는 세입자도 철거민도 아니다. 모두 사업 구역 내에 자기 재산을 보유한 집주인·땅 주인들이다.

ⓒ시사IN 조남진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앞에서 5월3일 뉴타운 재개발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 뉴타운이 어떤 뉴타운인가. 세들어 살던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집주인들에겐 ‘로또’로 통하던, 그래서 정치인이 추진하겠다는 공약만 내걸면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척척 당선시켜준, 한때 부동산 시장을 들썩거리게 만든 ‘꿈의 도시’ 뉴타운이다. 이런 뉴타운 사업을 ‘추진’도 아니고 ‘취소’해달라고 경기도 각 지역의 집주인 500여 명이 모인 것이다. 황사 바람이 부는 봄날, 이들은 주먹 불끈 쥐고 외쳤다. “투쟁! 투쟁!”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날 모인 주민들에게 뉴타운은 더 이상 개발 이득을 안겨주는 ‘황금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뉴타운이 계속 추진되면 내 재산이 반 토막 날 것’이라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12년 동안 채소 노점상을 하며 모은 돈으로 3층짜리 상가 건물을 하나 마련해, 슈퍼도 하고 세도 주고 있다는 뉴타운 부천 원미지구 주민 배갑섭씨(63)는 “지금 우리 동네는 집값도 내리고 임대도 안 되고 집수리조차 주인 마음대로 못한다. 보상금도 시세 1000만원(평당) 하는 땅에 300만~400만원밖에 안 나온단다. 내 평생 모은 재산을 빼앗긴다는 생각만 하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광명지구의 주민 최 아무개씨(66)도 “본전치기라면 모를까. 60평을 갖고 있어도 30평밖에 안 주고, 분담금도 엄청 많이 내야 한다는데 갓난아기도 찬성 안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뉴타운이 찬밥으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 경기 악화 탓이다. 아무리 조합원 보상금이 낮고 기반시설 부담금이 높아도 뉴타운 개발 후 아파트 가격만 껑충 뛰면 그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를, 이제 주민들 사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보금자리주택 등 공급 확대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전체적으로 하락한 것도 주요 원인이다.

거짓말이 되어버린 “헌 집 주면 새 집 준다”

군포지구 주민 임 아무개씨(54)는 “예전엔 뉴타운 개발하면 집값이 팍팍 뛰었지만, 이제는 시세도 죽고 다 지어놓아 봤자 여기저기 미분양 사태만 난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대지 않는가”라며 사업 취소를 희망했다. 평택 신장지구의 김태영씨(55)도 “뉴타운 지구 지정 때와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부동산 가격이 내리고 대출 금리는 오르고 건설사는 쓰러져가고…. 결국 그 부담을 조합원들이 다 지게 돼 있다”라고 말했다.

 

뉴타운 사업 취소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확신이 더욱 굳어진 건 ‘선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광명지구 김 아무개씨(68)는 “5년 전 서울 영등포 뉴타운 개발 지역에 살던 어머니가 충분한 보상도 못 받고 쫓겨나 지금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헌 집 주면 새 집 준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그때부터 알았다”라고 말했다. 뉴타운이 완공된 일부 지역의 원주민 재정착률이 애초의 홍보보다 훨씬 낮다는 소식은 새로 뉴타운 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의 주민에게 ‘학습 효과’를 불렀다. 실제 2008년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서울 길음 뉴타운 내 길음4구역의 원주민 재정착률은 17.1%에 그쳤다.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면 이들에게 다시 기회가 올까? 투기 세력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거주민에게 뉴타운은 부동산 경기가 어떻든 ‘그림의 떡’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변창흠 교수(세종대·행정학과)는 지난 4월27일 ‘뉴타운 사업 출구전략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뉴타운 사업 후 재정착을 위해 필요한 소득 수준과, 기존 원주민들의 소득 차이가 크기 때문에 원주민은 강제로 교체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신성호 오산 뉴타운사업반대 대책위원장은 “뉴타운 지역에 사는 집주인들은 거의 근로소득이 없는 노인들로 그나마 서너 개 있는 방을 세놓아 월세 수입으로 살아가는데, 설사 새로 짓는 아파트에 들어가 산들 그 관리비와 생활비는 누가 내주나?”라고 물었다.

“강북 발전의 대장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뉴타운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강북 지역은 누구나 살고 싶은 지역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2003년 11월18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연설문 발표와 함께 뉴타운 사업이 시작됐다. 서울 강북에서 전국으로 확산된 뉴타운 사업이 추진되는 곳은 현재 77개 지구(719개 구역)로, 7940만㎡에 달한다. 서울만 241구역, 경기 지역은 12개 시 23개 지구(89구역 확정)가 뉴타운 사업지로 선정됐다. 현재 이 중 상당수는 제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 경기 뉴타운 지구는 아직 주민들의 과반수 동의를 받은 추진위원회조차 설립되지 않은 곳이 태반이며(36쪽 표 참조), 서울에서도 착공에 들어간 뉴타운 구역 비율은 13.3%에 불과하다. 경기도 군포 금정, 평택 안정, 안양 만안지구는 뉴타운 사업지로 선정됐다가 주민들의 반대 등으로 도로 해제되기까지 했다.

서울시·경기도, 뾰족한 수 못 내놔

들끓는 ‘뉴타운 반대’ 민심에 놀란 각 지자체 단체장들은 서둘러 출구전략을 내놓고 있다. 지난 4월13일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뉴타운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뉴타운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추가 사업을 추진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다음 날 오세훈 서울시장도 “이미 시작된 뉴타운 지구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전면 철거 방식의 뉴타운·재개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라며 ‘신주거정비 5대 추진방향’을 내놓았다.

 

국회의원들도 뉴타운 추진 공약 대신 출구전략을 위한 입법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김성태·임해규 의원, 민주당 백재현·박기춘 의원 등이 내놓은 관련법 개정안들은 대개 뉴타운 사업의 용적률을 높이고, 기반시설 비용을 공공이 일부 부담해주는 내용을 담았다. 진보신당은 뉴타운의 근거법인 도시재정비촉진법을 폐기하는 대신 ‘주거안정을 위한 도시재개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며, 제3섹터형 공익 기관을 설립해 재개발 조합에 참여시키는 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뒷북 대책이 이미 지정된 뉴타운 지역 집주인들의 화를 누그러뜨릴 리 만무하다. 5월3일 집회에서 허현수 구리 뉴타운 반대위원회 위원장은 단상에 올라 “내년 총선·대선에서 뉴타운을 추진한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떨어뜨리고, 또 끝까지 복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옳소!” 하며 환호하는 집주인들 머리 위로, ‘꽝 뉴타운’ 같은 손팻말이 넘실거렸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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