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7일 박근혜 전 대표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문은 2012년 대선을 준비하는 ‘박근혜 브랜드’를 최초로 정리된 형태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탠퍼드 연설문부터 봐. 거기에 다 나와 있어.” 박 전 대표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돌아오는, 한 친박계 의원의 입버릇이다.

이 연설에서 박 전 대표는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disciplined capitalism)’라는 표현을 꺼내든다. 우리말 표현은 살짝 순화시켰지만, 영어권 청중에게는 ‘규율 있는(disciplined) 자본주의’에 가깝게 들렸을 단호한 표현이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 공동선이 합치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다” “시장경제 작동 과정에서 문제가 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등 ‘좌파적’인 발언도 쏟아졌다. 2005년의 박 전 대표였다면 “기업 투자를 위축시킨다”라고 펄쩍 뛸 만한 말이다.

 

〈그림 1〉 2004~2007년 복지 키워드

 


박 전 대표는 또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지지하는 한편, “정부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라고 말해, 복지를 정부의 책임으로 못 박았다. ‘박근혜표 복지국가론’이 첫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좌파 정부 때문에 기업이 투자를 안 해서 경제가 어렵다”라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박근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의 방향 전환처럼 보인다.

네트워크 지도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자. 〈그림 1〉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2007년 박 전 대표 발언 중 ‘복지’를 키워드로 한 의미 네트워크다. 첫눈에 흥미로운 논리가 보인다. ‘복지’와 같은 연두색으로 잡힌 동의어 블록(아래쪽)을 보면, 가장 크고 중요한 단어는 ‘감세’다. 즉, 이 시기 박 전 대표에게 복지란 감세를 통해 투자가 늘면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 것이다(연두색). 지금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시장원리주의 색채가 짙은 ‘복지=감세’라는 등식은, 당시까지만 해도 박 전 대표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감세를 하면 경제가 성장한다(청록색). 국민의 민생을 안정시키려면 경제 살리기를 해야 한다(남색). 그를 방해하는 잘못된 정치는 실용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이 바로잡아 대한민국 선진화를 이룬다(붉은색). 박근혜표 복지의 오리지널 버전은, 경제성장이 복지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줄 것이라는 전형적인 성장주의 모델이었다. 현 이명박 정부 모델과의 차이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시장주의 색채가 강해 보인다. 이 시기 복지 키워드 네트워크에서 정부의 적극적 구실이나 소외 계층에 대한 책임과 같은 키워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 2〉 2008~2010년 복지국가 키워드

 

 


복지가 왜 화두가 되었는지 설득 못해

“성장을 통한 복지와 작은 정부·큰 시장, 이것이 한나라당 경제정책의 큰 기조다. 정부는 가능한 한 간섭은 하지 말고 투자 여력을 키우기 위해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면 일자리가 생기고, 그게 양극화를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민생 3법, 감세안도 복지와 관련된 것이다.” 이 확고한 성장주의와 감세론은 2005년 11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가 한 말이다. 이 정치인이 4년 뒤에 ‘규율 있는 자본주의’와 ‘약자를 보듬을 정부의 책임’을 말할 것이라는 힌트조차 찾을 수 없는, 단호한 시장주의 선언이다.

방향 전환이 너무 급격해서였을까. 박 전 대표가 복지를 화두로 꺼내들기는 했지만, 특유의 촘촘한 프레임은 아직 구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조사 대상인 2010년 6월까지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 〈그림 2〉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인 2008~2010년 복지국가 키워드 네트워크다. 한눈에 봐도 듬성듬성 빈 곳이 많다. 복지가 왜 자신의 화두가 됐는지 설득하는 프레임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로 보인다. 복지국가가 삶의 질을 높여 국격을 올린다(남색)라거나, 공동체에서는 약자와 소외 계층도 행복해야 한다(붉은색)는 식의 추상적·단선적 논리가 대다수다.

성긴 프레임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또다시 아버지·어머니다. 복지국가는 국민을 위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꿈이었다는 식이다(초록색). “우리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다”(2009년 10월26일 박정희 30주기 추도식), “아버지께서 꿈꾸시던 대한민국. 자랑스럽고 품격 있는 선진 복지국가”(2009년 11월14일 박정희 생일), “어머니께서 꿈꾸셨던 소외된 사람 없이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2009년 11월29일 육영수 생일) 등, 박 전 대표의 복지국가 관련 주요 발언은 대부분 부모와 관련된 자리에서 나왔다.

지난해 12월20일, 박 전 대표는 사회보장기본법 개정 공청회를 열어 복지 정치 행보를 개시했다. 이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을 준비하며 한국을 모델로 했다.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건강보험 체계를 1977년부터 만들어왔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1977년은 박정희 정권에서 근로자 의료보험을 처음 도입한 해다. ‘박근혜=박정희=복지’ 등식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여기에 육영수 여사의 ‘보살피는 어머니 국가’의 이미지까지 더해보면, 박 전 대표가 복지 프레임에서 아버지·어머니라는 자산을 어떻게 배치할지가 보인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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